항목 ID | GC00702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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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음역 | Goryeosid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정자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제주의 역사.
[개설]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470여 년 동안 제주도 사회는 변화와 시련을 겪으면서 그 역사를 전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하여 편의상 몇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우선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대몽 활동을 펴다가 고려·몽고 연합군에게 평정되는 시기를 기준으로 크게 고려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로 한다. 전기는 다시 고려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던 탐라국 시대와 숙종대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군현시대로, 후기는 삼별초 정벌 이후 고려·몽고에의 귀속이 반복되는 시기와 원·명이 교체되는 시기인 고려 말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탐라국 시대]
탐라와 고려가 처음 접촉한 것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탐라가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는 태조 8년(925)이다. 이때 고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탐라에 미쳤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후 양자의 접촉은 태조(太祖)가 통일을 달성한 지 2년이 지난 태조 21년(938)에 이루어졌다. 이때 고려는 탐라국의 칭호를 수용하고 이곳 성주·왕자에게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태조가 탐라국 명칭을 받아들였듯이 탐라 지배층이 신라로부터 받은 성주와 왕자의 작호를 그대로 인정해 준 조처로 이해하여 탐라가 고려로부터 여전히 독립, 혹은 반독립의 제후국과 같은 위상을 유지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찍이 제기되었다. 반면 이러한 태조의 조처는 한반도 육지부 다른 지방에도 유사하게 행해졌으며 이는 모두 국가의 지방 지배를 행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고 있다.
태조가 탐라에 취했던 조처는 외관을 파견하지 않은 채 기능하던 지방지배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의 일환이라는 보편성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탐라국·성주·왕자 등의 칭호가 수용된 것은 그 보편성에 장기간 지속되어온 탐라국의 존재 등과 같이 제주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이 반영된 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탐라국 시대는 제주도가 반독립적 상태에서 성주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단지 고려에서는 탐라국 왕족들에게 무산계를 수여하거나 구당사(句當使)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지방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면서 비로소 고려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다.
[군현 시대]
숙종 10년(1105) 탐라군으로 개편되기 이전에 탐라를 관할하였던 관인은 도(道)나 연안 지역 군현에 집중적으로 나아가 섬 지역과 관련한 지방 지배 업무를 주로 관할하던 구당사였다. 그런데 구당사를 통한 고려의 탐라 지배는 지방관으로서 현령이 비로소 파견되는 의종대 이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속종 10년 설치된 탐라군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의 위상을 지닌 군현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탐라군으로 개편되기 이전 탐라의 토착세력은 향·소·부곡의 토착 세력과 같이 중앙 관인사회 진출과 관직 취득에 있어서 차별 대우를 제도적으로 받았다. 반면 탐라군으로 개편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탐라의 토착 세력이 다른 군현 단위에 살던 주민과 동등한 정치·사회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역사상 제주 출신으로 최초의 수상이 되었던 고조기(高兆基)의 관직 진출 과정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탐라군으로 승격하여 탐라민의 정치·사회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원 간섭기]
1271년(원종 12)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주에서 약 2년 반 웅거하였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우선 주력했던 일은 방어 시설의 구축이었다. 이때 쌓은 방어 시설로는 항파두성·애월목성·환해장성 등이 있다. 제주 삼별초 방어 시설은 내성·중성·외성의 3중성을 둘러친 진도의 그것보다 훨씬 강화된 느낌을 준다. 반면 제주 삼별초의 군사 활동은 조운로의 차단, 개경 정부에 대한 무력 과시, 필요한 인적 자원의 납치 등과 같은 산발적 위협 공격에 머물고 있어 진도 거점 시기와는 그 기세가 약화된 상태였다.
제주 삼별초의 군사 활동은 원종 14년(1273) 여·원 연합군에 의해 토벌되었으며, 이후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다. 원은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병참기지로 제주를 활용하는 한편, 목마장을 직접 마련해 원 제국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키우는 등 물자 수탈에 초점을 맞춘 탐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주 사회의 주도권도 공민왕대(1352~1374)에 이르러서는 ‘하치(哈赤)’라고 일컬어지던 목호 세력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원의 탐라 국립 목장에 배속되어 말과 소 등 사육을 관할하던 몽고족이었다.
따라서 제주 관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고려와 목호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특히 공민왕 23년(1374) 명의 제주 말 요구를 계기로 일어났던 목호 세력과 고려의 충돌은 양자의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때 최영에 의해 목호 세력은 최후를 맞이하고 제주는 고려에 최종적으로 귀속하게 되었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 이후 100여 년 간 제주는 고려와 원에 이중으로 귀속되어 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제주 사람들은 고려와 원에 이중으로 버거운 세금을 내는 한편, 제주에 온 고려 관리뿐만 아니라 원의 제주 경영에도 종사했던 토착세력으로부터도 수탈을 당해 제주는 커다란 희생을 겪었다.
[원·명 교체기]
목호 세력의 수뇌부가 궤멸된 이후 제주 사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최영의 정벌 이후 제주에서는 고려에 대한 반란이 잇따랐다. 최영이 떠난 직후 제주에서는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아를 불태우며, 고려 관리를 살해하는 등 반고려의 기치를 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차현유의 난이 평정 된 이후에도 우왕 2년(1376) 탐라 목장 소속의 ‘하치’였던 강백언(姜伯諺)이 반기를 드는 등 반고려의 분위기와 행동은 제주 사회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나 토착 세력은 제주 관할에 참여해 반고려, 반명 활동을 벌인 제주 사람들과 목호 잔존 세력을 단호하게 처단했다. 목호 잔존세력이 주동하여 일으킨 반기에도 제주 주민들은 동조하지 않았던 편이다. 이로부터 제주사람들은 점차 목호 잔존 세력을 배척하고, 목호가 남긴 흔적 자체도 불식하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반면 최영의 정벌 이후에도 명의 제주 말 요구는 고려를 통해 계속되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말을 바쳐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게다가 관리의 수탈은 여전하였고, 최영이 목호를 정벌할 때 많은 제주 주민이 죽임을 당한 터라 고려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반감은 여전히 클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제주사람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왕 12년(1386) 토착 세력들의 자식들을 불러들여 회유하는 한편, 명의 제주 말 구매 의사를 철회시켰다. 이로써 탐라는 명실상부한 고려로의 귀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제주 정벌은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으나, 몽골족과 공존했던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또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