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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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海君流配 |
영어음역 | Gwanghaegun Yubae |
영어의미역 | King Gwanghaegun's Exi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1637년(인조 15) 조선 15대 국왕인 광해군이 폐위되어 제주로 유배된 사건.
[개설]
1575년(선조 8)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제15대 국왕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제주로 보내졌다.
[역사적 배경]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데 힘썼고,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러한 행위는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 중 이서와 이귀, 김유 등이 이러한 사류(士類)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경과]
광해군은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도에 있다가 1637년(인조 15)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염려하여 겨울옷을 광해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1637년 6월 6일 중사(中使)·별장(別將)·내관(內官)·도사(都事)·대전별감(大殿別監)·나인·서리·나장(羅將)들이 광해군을 압송하여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고, 다음 날 제주로 들어와서 위리(圍籬)하였으며, 속오군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번갈아 가며 숙직하였다고 한다.
1638년(인조 16) 심연이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인조가 광해군에게 여름과 겨울에 의복을 보내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640년(인조 18) 9월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이 광해군을 잘 돌보았으나, 결국 1641년(인조 19) 7월 7일 제주읍성 내의 유배 장소에서 사망하였다.
[결과]
광해군이 사망하자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옮겨 안장하였으며, 당시 제주 목사 이시방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