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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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희태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이루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전반.
[개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래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숭상되었지만 정치의 이념과 운영은 유교에서 구하였다. 고려 말에는 유학의 한 파인 성리학이 전래되었고, 성리학을 개혁 사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신진사대부들의 노력은 조선 왕조의 성립이라는 역성혁명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사회제도를 다져 나갔다. 성리학의 연구도 심화되어 15~16세기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중심사상으로 확실히 정착되었으나 조선 후기 들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던 향교는 교육 기능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교가 국가이념이나 국학의 지위를 잃고 일종의 종교 단체로서의 위상만 갖게 되었다. 유교식 의례는 민간에서 명맥만 유지하였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유교 교육기관인 향교에 이어 서원이 속속 세워지고 충효열의 유교 윤리는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가 되어 많은 충신, 효자, 열녀를 배출하였으며 ‘해남 육현’으로 일컬어지는 윤구, 윤선도, 유희춘, 최부, 임억령, 박백응 같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해남 유학은 최윤옥과 강릉대도호부사 이영화에 기원을 둔다. 이어 최부와 어초은, 윤효정 대에 해남 유학은 중흥하였다.
또한 오랜 유학 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 박혀 임진왜란 때는 의병 활동으로 이어졌다. 유교에 기반한 문사철(文史哲) 정신은 해남의 문인화를 꽃피우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들면서 해남의 향교는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해남향교 주관으로 2원[해촌서원, 미산서원] 15사우를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해남의 유교]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해남 지역에도 유교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 해남 지역에는 성리학의 보급을 위한 향교와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세워져 석전례(釋奠禮)를 시행하였다. 성리학이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면서 음사(陰祀)를 대신하여 중앙에는 사직단(社稷壇), 각 고을에는 여단(厲壇)과 산천단(山川壇)이 설립되어 유교식 제례가 시행되었다. 또한 유학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 사우도 많이 건립되었다. 해남에 세워진 서원은 방춘서원, 해촌서원, 미산서원이다. 사우는 예양사, 영산사, 용연사, 충절사, 대산사, 옥봉사, 덕촌영당, 충정사, 송천사, 금성사, 용지사, 노송사 등이다.
유교가 향촌 사회에 보급되면서 향약이 실시되었고, 충효의 이념이 정착되어 나갔다. 이에 많은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정운충신각, 이유길 유허비각, 원주이씨삼효문, 무안박씨 열녀각, 방두선 효자각, 조석창 효자각, 효자 김장호 정려, 임달유 효자각, 박필양 효자각, 효열부 나주임씨정려 등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의병으로 나가 순절하는 충신과 열사가 많았다. 특히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해남 전라우수영 울돌목에서 큰 승리를 거둔 명량대첩은 유교정신의 승리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해남의 유교]
조선 후기 과거제가 폐지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신식 교육이 들어오면서 유교문화의 산실이었던 향교는 교육 기능을 상실하였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유림(儒林)의 항일 정신은 억압되었으며, 유림을 회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시 동원 체제가 되자 유교는 일본 천왕을 믿는 것을 유교와 일치시키는 황도유교설 같은 친일적인 학설만 남게 되었다. 이에 유교는 국가이념이나 국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의 위상만 갖게 되었다.
향교를 총독부령에 따라 지방관에 복속시켜 향교의 자치권을 없애자 해남 향교의 기능은 더욱더 위축되었다. 일제는 유생들을 회유하기 위해 1911년 6월 경학원(經學院)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유교의 인의충효(仁義忠孝) 사상을 강조하여 일왕에 순응하는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교육을 통제하고 유학의 말단 교육기관인 서당을 통제하면서 유림계의 친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8년 2월 조선총독부령으로 「서당규칙」을 공포하여 국어와 국사 교육을 금지하고 대신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며 항일 의식을 전수하는 서당 교사를 감시·회유하였다. 유교의 제례와 의례의 형식적인 부분은 명맥만 유지하면서 지켜져 나갔다.
[현대의 해남의 유교와 과제]
광복 이후 이념 갈등 속에서 유교는 어떠한 이념과 방향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유교 교단은 유도회와 성균관·향교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는 데 꾸준히 노력하여 왔다. 해남향교는 사회참여에 노력을 기울여 2002년에는 연산장학회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왔다. 또한 조선 시대에 고령의 문신들을 위로하고 예우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열었던 기로연 행사를 재현하며 경로효친과 미풍양속을 지켜 나가고 있다. 한편 어린이와 청소년 인성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어린이를 위한 한문교실을 개강하고 청소년들에게는 학교 예절, 향토사, 전통문화 등의 인성교육도 실시하였다. 2006년에는 여성들도 유림으로 입교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며 보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