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89 |
---|---|
한자 | 鳴梁海戰 |
영어공식명칭 | Battles Myeongny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윤섭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7년 9월 16일 - 명량해전 발생 |
---|---|
종결 시기/일시 | 1597년 9월 16일 - 명량해전 종결 |
발단 시기/일시 | 1957년 - 명량해전 정유재란 발생 |
발생|시작 장소 | 명량해협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
종결 장소 | 명량해협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이순신|김억추|구루시마 |
[정의]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해남과 진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에서 일본 왜선을 크게 격파한 해전.
[개설]
임진왜란 전쟁 중 일본은 1597년 정유년에 우리나라를 다시 침입한다. 이때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에 의해 조정에서 탄핵을 당하였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97년 일본의 재침략에 의해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원균이 전사하자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왜군은 서울로 가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남해안의 중요한 요충지인 해남과 진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을 지나가려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전선과 수군을 모아 1597년 8월 어란포에 모인 왜군과 전면적인 일전을 준비한다. 우수영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아래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일본의 왜선 133척을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의 와중에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이순신은 호남 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하여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이 무렵 조선의 중앙정부는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하였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절도사로 옮겼다.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하였다.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군사를 모아 명량해전(鳴梁海戰)에 대비하게 된다.
[경과]
정유년 일본의 재침략에 의해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하고 원균이 전사한 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이때 이순신은 남은 전선과 수군을 모아 1597년 8월 어란포에서 왜군과의 전면적인 일전을 준비한다. 1597년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고 겨우 12척만 도망하여 남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너무도 미약함을 알고, 1597년 8월 15일 이순신에게 육군에 종사(從事)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수군의 작전이야말로 승리의 요체임을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8월 28일 왜의 적선이 해남 어란진 앞바다에 출현하였다. 8월 29일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하여 보름 동안 머물렀다. 9월 15일에는 조수를 타고 해남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어 울돌목을 지켰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에게 명령을 내리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왜적선은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9월 14일 어란진에 도착하였고,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운명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
왜군은 대 선단을 이끌며 공세를 취하자 조선 수군은 불과 13척의 배로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 그때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로의 진영이 뒤엉키기 시작하자 조선 수군은 적장 구루시마[來島通總]의 목을 베어 사기를 높이며 총공격을 감행한다. 명량해전은 우리 수군뿐만 아니라 인근 백성들이 의병으로 참여하는 등 모두 한몸이 되어 싸움에 임한 전투였다. 명량해전에서 왜군은 50여 척의 배를 잃고 퇴각하고 만다. 반면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 초선 32척으로 단 1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승리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왜군은 수군을 이용해 북진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명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종전과 승리를 이루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해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