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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894
한자 河東儒學-中心-安溪-
영어의미역 Angye Village, Center of Confucianism in Ha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마을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병철

[개설]

옛날부터 진주에서 이름난 마을을 꼽을 때 “첫 번째가 안계(安溪)요, 두 번째가 원당(元堂)이요, 세 번째가 사월(沙月)이다.”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마을이 진주목(晉州牧)에 속했기 때문에 진주의 으뜸가는 명촌(名村)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안계마을이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풍경이 수려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 때문이다.

[선비의 모습을 닮은 사림산 아랫마을]

『옥종면지』에 의하면, 안계마을 앞에 달걀처럼 생긴 똥뫼가 있는데 그 형국이 마치 닭이 달걀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안계(安鷄)라고 불리다가, 후에 안계(安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수세(水勢)가 똥뫼를 안고 흘러 수구(水口)가 보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대홍수로 인해 계천의 흐름이 바뀌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전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인 백두정간(白頭正幹)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유학의 으뜸이 되었다. 그 계통을 이은 인물들은 깊이 함양하고 돈후하며,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채가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유풍이 있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기절(氣節)이 가장 뛰어났다. 그 뒤를 이은 인물들은 마음과 힘을 다해 극진히 실천하며, 의로움을 즐거워하고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로움 때문에 뜻을 굽히지 아니하며 해로움에 의해 절개가 변하지 않는 우뚝한 지조가 있었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

이렇듯 이익은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우뚝한 두 인물의 탄생을 그들이 성장하고 활동한 지역의 명산과 연결 지어 설명하였다. “명산(名山)으로 인해 명현(名賢)이 배출되고, 명현에 의해 명산은 더욱 알려진다.”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말이다.

안계마을을 감싸고 있는 사림산(士林山)지리산 천왕봉의 산맥이 동남쪽으로 힘차게 100여 리를 뻗어 내려와 형성된 산이다. 그 형상이 아름다운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는 뜻으로 ‘가사산(佳士山)’이라고도 불린다. 사림산 아래에서 학식과 덕망이 탁월한 선비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으니, 산의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겸재 하홍도와 모한재]

1. 주자를 사모하여 모한재라 이름하다

하동 유학의 최고봉은 누가 뭐래도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이다. 그는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추앙될 만큼 학덕이 높았으며, 경상우도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1553~1612]에게 수학했는데, 하수일조식의 제자인 각재(覺齋) 하항(河沆)[1538~1590]에게 배웠다. 하홍도조식으로부터 하항하수일에게 내려온 남명학의 핵심을 전수받아 후대에 이어지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계마을 안쪽 계곡을 안식골(安息골)이라고 부르는데,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에 모한재(慕寒齋)가 있으니, 바로 하홍도가 독서와 강학을 하던 곳이다. 재실의 이름을 ‘모한(慕寒)’이라 지은 까닭은 주자(朱子)의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주자는 1169년 어머니 축부인(祝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한천오(寒泉塢)에 장례를 치르고 그 곁에 정사를 지어 ‘한천(寒泉)’이라 편액했는데, 주자가 창건한 첫 번째 서원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시묘(侍墓)를 하면서 독서와 저술 및 강학에 힘썼다.

하홍도모한재에서 강학을 하면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당대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특히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깊이 나누었다. 지금도 모한재에는 허목이 쓴 현판과 기문이 걸려 있다. 또한 하홍도가 거닐며 시를 읊조리던 영귀대(咏歸臺)의 암벽에도 허목이 쓴 글씨의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2. 모한재에서 계승된 하홍도의 학문

하홍도의 학문은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과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을 거쳐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과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1671~1727]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하세응의 학문은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1701~1758]에게 전수되어 남고(南皐) 이지용(李志容)[1753~1831], 월포(月浦) 이우빈(李佑贇)[1792~1855] 등을 거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1870~1946]에게로 전해졌다.

특히 하철하홍도의 종질(從姪)로 어릴 적부터 하홍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여 현달하기보다는 학문을 탐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하홍도가 손발이 저리는 병에 걸려 거동하기 불편하자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일들을 시중들었으며, 손님을 맞이할 적에는 곁에서 모시고 대신 접대를 했는데, 행동과 일처리가 예의에 합당하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왕의 명을 받아 어사(御史)로서 하홍도에게 예법에 관한 것을 묻고 난 후 복명할 적에, 하홍도의 학문과 덕행을 말하면서 하철의 예법도 볼 만한 것이 많았다고 칭송하였다. 또한 명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김명겸하철과 더불어 그 문하에서 명망이 뛰어난 인물로 일컬어졌다. 하홍도가 세상을 떠난 후, 스승을 향사(享祀)하기 위한 종천서원(宗川書院)을 창건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상량문을 지었다.

모한재하홍도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져 강학 활동이 이루어졌다. 해사(海史) 정돈균(鄭敦均)모한재로 찾아가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에게 수학하였는데, 당시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등도 함께 문하에서 배웠다. 1879년(고종 16)에는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최숙민 등이 모한재에 모여 강학을 하였다.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모한재의 유계(儒契)를 복원하고 거금을 모아 1912년 모한재에서 『겸재집(謙齋集)』을 중간하였다. 1915년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은 벗들과 함께 모한재에서 강학을 했으며, 1927년에는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1905~1987]가 여러 벗과 함께 모한재에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처럼 모한재는 하동 지역 유학자들이 세대를 이어서 학문을 강론하고 심신을 수양한 곳으로, 하동 유학의 중심지이자 하동 유학자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계마을 출신의 유학자들]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운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생년순으로 열거해 보자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 하홍도,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 김명겸, 하철,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 김성운, 한계(寒溪) 하대명(河大明), 괴전와(愧全窩) 하대관(河大觀), 국헌(菊軒) 하달성(河達聖), 중은(重隱) 강석좌(姜錫佐), 하달홍, 간취당(澗翠堂) 정우빈(鄭瑀贇), 효재(嘐齋) 정원항(鄭元恒), 조성가, 최숙민, 강병주, 월산(月山) 조성주(趙性宙), 하응로, 정돈균, 석전(石田) 문진호(文晉鎬), 수재(守齋) 정봉기(鄭鳳基),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 사와(士窩) 하재도(河載圖), 신암(愼庵) 최긍민(崔兢敏), 청천(晴川) 정기식(鄭基軾), 담헌 하우선, 이일해, 경재(敬齋) 김기주(金璣柱) 등 30여 명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하홍도, 하홍달, 하철, 하덕망, 하대명, 하대관, 하달성, 하응로, 정돈균, 하재도, 하우선 등 11명은 안계마을 출신 유학자로, 앞에서 거론한 30명의 유학자에서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미 언급한 하홍도, 하철, 김명겸을 제외하고 그 외의 인물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낙와 하홍달

하홍도의 아우로, 모한재에서 백형과 함께 학문을 탐구하고 수양에 힘썼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북송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에 견주어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고 칭송하였다.

2. 양정재 하덕망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여러 번 조정에 천거되었는데, 1735년(영조 11) 경연관(經筵官) 김재로(金在魯)가 그를 임금에게 천거하였으며, 1737년(영조 13)에는 경상도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영남의 인재로 추천하였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그를 위해 지은 만시(輓詩)에서, “두류산 아래에 예부터 현인이 많았으니, 하홍도의 유풍을 우뚝히 전하였네.”라고 칭송하였다.

3. 한계 하대명

하홍달의 증손이며, 하철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하덕망이다. 그는 집안 대대로 전수해 온 남명학에 바탕하여 학문을 성취했으며, 어릴 적부터 총명함이 뛰어나고 문장이 완숙하였다. 20세 때 향시(鄕試)에 연이어 합격을 했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학문의 방향을 전환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집안의 아우인 괴전와(愧全窩) 하대관(河大觀)[1698~1776]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웅사(雄辭)와 건필(健筆)로 당시에 널리 알려졌으며, 예설(禮說)에 조예가 깊었다.

4. 괴전와 하대관

하홍도의 증손으로, 집안의 형인 하대명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개인적 행실이나 사회적 책무에 있어 모두 올바르게 행하였으며, 고금의 서적에 두루 통달하여 학문이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진양속지(晉陽續誌)』를 편찬할 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5. 국헌 하달성

진주목사 조덕상(趙德常)이 하홍도의 문집과 연보(年譜)를 빌미로 삼아 “율곡(栗谷) 이이(李珥)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비방하고 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을 높였다.”라는 말로 경상감사 조엄(趙曮)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1759년(영조 35) 종천서원에서 하홍도의 위패를 출향(黜享)하고 『겸재집』의 판본과 인본(印本)을 불사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종천서원 원변(宗川書院院變)’이라고 일컫는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하달성은 통분히 여겨 하홍도의 신원(伸寃)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였으며, 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수감된 하홍도의 증손 하대관이 석방되도록 백방으로 일을 도모하였다. 결국 1778년(정조 2) 정조조엄과 조덕상의 관직을 삭직하고 원변의 주동자 3인을 엄형에 처하였으며, 기타 관련자를 유배시키는 것으로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 하달성종천서원 원변의 발단과 결말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결사적으로 일을 주선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종천서원변록(宗川書院變錄)』 4책을 편찬하였다.

6. 니곡 하응로

하응로종천서원에서 인근의 학자 조성가, 조성주, 월주(月洲) 하조헌(河祖憲) 등과 함께 강학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여 고을의 풍습을 순화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겸재집』을 중간하고 『남명집(南冥集)』을 교정하여 간행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7. 해사 정돈균

모한재로 찾아가 하달홍에게 수학하였으며, 조성가·최숙민 등과 함께 절차탁마하였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극재(克齋) 하헌진(河憲鎭)과 더불어 10여 년간 모한재를 지키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학문을 닦았다. 그 뒤 하헌진과 같이 후산(后山) 허유(許愈),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 세 선생에게 나아가 종유하였다.

8. 사와 하재도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용모와 행실이 반듯하였다.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하여 유림으로부터 명망을 받았다. 하동 지역에 거주한 여러 벗들과 함께 조계(朝溪)의 강가에 만수당(晩修堂)을 지어 학문과 강학에 힘을 쏟았다.

9. 담헌 하우선

하홍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학을 계승하였으며, 면우 곽종석에게 수학하였다. 선조인 하철의 실기(實記)와 하응로의 유집(遺集)을 찬수하여 간행하였다. 1937년 고을의 선비들과 ‘구졸계(九拙契)’를 만들었는데, 망국(亡國)의 한(恨)으로 인해 계를 형성한 것이다. 1939년 선비들과 모한재에서 모임을 가지고 수속계(修續契)를 만들었다.

해방 후 1956년 덕천서원의 원임(院任)이 되었다. 유계(儒契)를 만들어 덕천서원의 동재(東齋)를 건축했으며, 『덕천연원록(德川淵源錄)』을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1964년 고을의 선비들과 문하의 제자들이 유계(儒契)를 만들어 그가 거처하던 곳의 옆에 3칸의 가옥을 지어 주고 사산서당(士山書堂)이라고 이름 하여, 그곳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안계리의 유교 유적]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모한재 이외에도 유학의 중심 마을답게 서원과 서당, 재실, 비석 등 많은 유교 유적이 있다. 게다가 수많은 유학자들의 묘지나 문집, 고문서까지 포함하면 그들의 발자취는 더욱 늘어난다. 대표적인 유적만 몇 곳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홍도 유적비

하홍도의 학문과 삶을 기려 지역 유림과 후손이 협력하여 1997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가마고개에 세웠다. 비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의 문인인 진와(鎭窩) 이헌주(李憲柱)가 지었다.

2. 사산서당

하우선을 위하여 문인들이 계를 만들어 1963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심방동에 창건하였다. 사산서당의 기문은 우인(于人) 조규철(曺圭喆)이 지었다.

3. 정산재(鼎山齋)

운당(雲塘) 이염(李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2세손 이홍렬(李泓烈)이 1915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마을에 건립하였다. 이염은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모신 9현(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식의 문인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친분이 두터웠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임금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재실의 기문은 종후생(宗後生) 하인기(河仁基)가 지었다.

4. 직방재(直方齋)

하철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자리한 입덕문(入德門) 앞 설강(雪江) 가에 건립하였는데, 200년이 흘러 폐허가 되자 후손들이 하동 사림산의 동쪽에 중건하였다가 다시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송정(松亭)으로 이건하였다. 매년 음력 4월 5일에 하철을 주향으로 모시고 하우선을 배위로 하여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 직방재의 이건 기문은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지었다.

[안계마을의 전통을 이어나가길 기대하며]

이렇듯 안계마을은 하동 지역 유학의 중심지로, 20세기 중반까지 학문과 덕행이 탁월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안계마을이 뛰어난 유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며 그 중심에 모한재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뿌리가 없이는 줄기와 잎이 무성할 수 없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하동 유학의 중심지를 오늘날 다시 새롭게 인식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동을 찾는 이들이 모한재에 들러 오래되고 울창한 은행나무 아래를 거닐며 예전에 이곳에서 강학하던 유학자들의 삶과 지혜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거의 뿌리를 통해 오늘의 우리가 성장하고 현재의 성장을 통해 미래를 가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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