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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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德望 |
영어음역 | Ha Deokmang |
이칭/별칭 | 첨경(瞻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6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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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43년 |
추모 시기/일시 | 174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위태마을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양(晉陽)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개설]
하덕망(河德望)[1664~1743]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가 병들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킨 일도 있다. 부모의 상을 모두 마친 후, 과거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참된 학문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곁에 정자를 지어 ‘광영정(光影亭)’이라 하였고, 서재의 이름을 ‘양정재(養正齋)’라 하였다. 이후 세속의 명리(名利)를 끊은 채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람들이 정자와 재실 이름을 일컬어 그를 ‘광영정’, ‘양정재’라 호칭하였다.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첨경(瞻卿). 호는 광영정·양정재이다.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된 하광국(河光國)이며, 할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이다. 하홍달은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에 증직된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이며, 어머니는 박신(朴紳)의 딸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다.
박신은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1583~1640]의 아우이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3대가 증직된 것은 하철의 셋째 아들 하덕휴(河德休)[1670~1754]의 공덕 때문이다. 전처는 노한보(盧漢輔)의 딸 광산 노씨(光山盧氏)이며 그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고, 후처는 최우첨(崔宇瞻)의 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며 그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하덕망은 대대로 남명학(南冥學)을 계승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가학을 배우고 익혔다. 아우인 하덕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와 함께 한집에 거처하며 우애롭고 화목하게 지냈는데, 사람들이 연당(蓮堂)의 두 학(鶴)이라고 칭송하였다. 경전을 연구하는 것 외에도 육예(六藝)·의약(醫藥)·천문(天文) 등에도 해박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되었는데, 1735년(영조 11) 경연관(經筵官) 김재로(金在魯)가 왕에게 아뢰기를 “영남의 인재가 누구인지를 위아래로 두루 물어보았는데, 사람을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칭찬이 자칫 실정보다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진주의 선비 하덕망과 안동의 진사 이광정(李光庭)은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행의(行誼)가 특출하니, 조정에서 등용한다면 비루한 정치를 쇄신하는 데 참으로 합당할 것이며, 또한 영남 지역을 덕화로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조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등용하려 하였지만, 끝내 관직이 제수되지는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 13년[1737]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이광정의 문한(文翰)과 박몽징(朴夢徵)의 독학(篤學)으로 끝내 일명(一命)을 받지 못하였으니, 전후 도신들의 천문(薦聞)이 문구(文具)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안(禮安)의 이수연(李守淵)은 곧 선정(先正) 이황(李滉)의 6세손(世孫)으로, 가훈(家訓)을 정성스럽게 지키고 학식의 조예도 뛰어났으므로 재랑(齋郞)에 제수된 적이 있었습니다만 버리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안동(安東)의 김세열(金世烈)은 평소 지조(志操)가 있어 곤궁한 것을 견디고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영우(嶺右)에서는 하덕망·강성화(姜聖和)가 대신의 천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안(比安)의 권빈(權䎙)은 지조와 행실이 매우 확고하고 학행(學行)을 겸비하였으며, 안음(安陰)의 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금산(金山)의 조세붕(曹世鵬)은 명신(名臣) 조위(曹偉)의 후손으로 효우(孝友)와 행실이 한 고장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도내의 명망이 있는 선비들이니, 모두 똑같이 수록(收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지만 실제 관직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양정재유고(養正齋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위태마을 범바우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여러 사람들이 하덕망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 만시(輓詩)를 썼는데, 그중에서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두류산 아래에 예로부터 현인이 많았으니, 겸재의 유풍을 우뚝 전하였네”라고 칭송하여 하덕망의 학문이 남명학 및 겸재 하홍도의 학문을 계승하였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제산의 아들인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은 “푸르른 두류산 구름 속에 우뚝한데, 높은 사람 높은 산을 나는 함께 보네”라며 하덕망의 학덕이 두류산처럼 우뚝 높다고 묘사하였다. 1745년(영조 21)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