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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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의미역 | independent Activist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최숙향 |
[정의]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거나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하동은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을 거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하동에는 독립운동의 사적지와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정부 차원의 서훈을 받은 애국지사가 5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의병 운동]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의병 운동은 하동에서도 활발했다. 의병 활동과 교전 회수의 80% 이상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했다는 점에서 하동이 경상남도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의병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수비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 등을 처단하였다. 주도적 인물로는 박매지(朴每之)[1878~1909], 임봉구(任鳳九)[1880~1908], 이성로(李成魯)[1878~?], 우수보(禹守甫)[1879~?], 김의홍(金義洪)[1886~1908], 조기섭(趙奇攝)[1881~1908], 손몽상(孫夢尙)[1878~1908], 박홍지(朴弘之)[1881~1908], 손기혁(孫琪赫)[1878~1946] 등이 있다.
박매지는 1908년 진주형무소 폭파 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진주 대평면 전투에서 다시 붙잡혀 총살되었다. 임봉구와 이성로, 김의홍은 일진회원을 처단하였으며, 조기섭은 청암면 안양리(安養里)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 순국하였다. 우수보는 일본 첩자 쓰다만끼지를 살해하였고, 그의 의병진은 하동군 악양면에서 일본군 수비병 18명을 사살하였다. 손몽상은 하동·구례 등에서 활약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박홍지는 하동군 적량면에 군수품을 구하려고 잠입하였다가 일본 수비대와 교전 끝에 전사하였다. 손기혁은 군자금 모금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
1. 3·1 운동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 등 구국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떨쳐 일어났다. 특히 1919년 3·1 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하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鄭世基)[1897~1981]는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박치화(朴致和)[1880~1945]는 3월 18일 적량면장을 사직하고 읍내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낭독하며 만세를 불렀다. 3월 23일 정세기, 정성기(鄭成基)[1886~1943], 이경호(李璟鎬)[1890~1920], 정이백(鄭移伯)[1919~?] 등도 하동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하였다.
문공학(文孔學)[1897~1946]은 3월 21일 횡천면에서 만세를 불렀고, 4월 3일 북천면에서 다시 만세 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하일로(河一魯)[1868~1938]는 옥종면 안계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최인우(崔寅愚), 정화영(鄭華永), 권대형(權大衡)[1898~1947], 권상숙(權尙淑), 권복대(權福大) 등도 이에 참가하였다.
정남시(鄭南時)[1885~1932]는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정재운(鄭在雲)[1895~1950]은 진교면 시위를 주동하였다. 이종인(李宗仁)[1869~1944], 박영묵(朴永默)[1881~1973], 정상정(鄭相正)[1878~1920] 등은 고전면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김기범(金淇範)[1885~1951]은 청암면에서 만세를 불렀다.
하동의 3·1 운동은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임시 정부(臨時政府)에서 활약하게 하는가 하면 하동청년동맹과 신간회 하동지회, 근우회 하동지회 등을 설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임시 정부와 중국에서의 활동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서자 정재완(鄭在涴)과 문영빈(文永彬)은 이를 위해 활동하였다. 정재완은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의 만석 거부(萬石巨富)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통해 임시 정부에 자금 지원을 하였다. 문영빈은 1920년대 한용운 등과 함께 사천·곤명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구국 운동을 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강우석(姜佑錫)[1901~1965]은 혈성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는데, 혈성단은 임시 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로서 군자금 모집과 임시 정부의 선전 활동을 폈다. 김홍권(金弘權)도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활약했다.
김재영(金縡濚)[1892~?]은 조선의열단 단원으로서 청년동맹회를 조직하여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였으며, 백운룡(白雲龍)[1925~?]은 중국 산동성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광복군 활동을 하였다.
3. 학생 및 지식인 운동
이세기(李世基)[1923~1976]는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출신으로 부산제2상업학교 재학 중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 심판의 부당한 처사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자 이세기는 즉각 항의하고 한국인 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하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병도(李丙燾)[1923~1991] 역시 하동군 양보면 통정리 출신으로 같은 대회에 참가했다가 발발한 항일 투쟁으로 옥고를 치렀다. 신현중(愼弦重)[1910~1980]은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반제동맹의 한국지부격인 ‘반제부(反帝部)’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무준(趙武駿)[1918~1989]은 구주의학전문학교(九州醫學專門學校) 학생으로 유학생에게 일본의 멸망을 예언하는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조학제(趙鶴濟)[1904~1945]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시 조선청년동맹 동경지부 조직책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잠시 귀국하여 국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임시 정부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잠입하였으나 체포되었다. 조정래(趙正來)[1914~1935]는 경상남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 휴교를 감행하여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전기학교(東京電氣學校)에 입학하여 일본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 전기학교반(日本反帝同盟東京地方委員會電氣學校班)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반제동맹(朝鮮反帝同盟) 결성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 받고 병보석된지 3일만에 순국하였다.
4. 여성 운동
채소정(蔡小丁)은 1919년 4월 하동보통학교 학생으로서 하동읍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근우회 하동지회를 주도하며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하동군지부와 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한순(金漢順)은 1928년 7월 근우회 하동지회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 위원장으로서 채소정, 조필열(趙必烈), 강정회(姜貞會), 조복금, 박삼모, 조정희, 김귀례, 신수명, 제영순, 김보배, 김점균, 김은혜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홍순남(洪順南)은 하동읍 출신으로서 광주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박영자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 만세를 주도하였다. 특히 제영순은 근우회 중앙 집행위원이 되고, 1932년 사회과학연구회에 동참하고 경남노조 활동에도 참여했다. 조복금은 교원노조에 관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현황]
하동군에서는 2008년에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 취간림에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을 세우고, 그 주변에 박매지 등 독립투사의 비석을 건립하여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1919년 3월 18일 하동읍내장터에서 낭독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원본이 1986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박치화 고가의 천정 속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하동 군민들의 독립 의지와 저항 의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