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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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준형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역사.
[개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 말살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하동 지역에서도 항일 독립 운동은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반일 민족 운동이나 소년 운동, 청년 운동 등과 같은 반봉건적 근대화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지방 행정 제도 개편]
1. 1906년 군의 통폐합과 하동군의 확대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자, 일본은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4월 내부(內部) 내에 지방 제도 조사 위원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새로운 법령들을 마련하여 10월 1일부터 시행한 행정 구역 조정도 그 하나이다. 통감부에서는 일부 군의 통폐합과 함께 군의 구역을 대폭 개편하여 비지(飛地)로서 다른 군내에 위치하고 있던 것 등을 조정해서 다른 군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면의 통폐합을 실시하여 면의 수에도 적지 않은 변동이 생겼다.
진주군의 경우에는 지역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이유 때문인지 진주의 일부 면 지역이 인근 다른 군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때 하동군에는 진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북평(北坪)·종화(宗化)·가서(加西)·운곡(雲谷)·청암(靑岩)·대야(大也)·정수(正水) 등의 7개 면이 편입되어 전체 면 수가 21개로 되었다. 이로 인해 하동군은 면적에서나 인구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2. 지속적인 행정 구역 개편과 12개 면 체제
1914년에 다시 전국적인 행정 구역 개편 조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특징은 군과 면을 대대적으로 조정하여 군·면의 수를 대폭 축소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을 기하여 부·군의 구역을 개편하고 군의 수를 종전의 317개에서 220개로 대폭 감축하였다. 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신설된 군을 감안하면 없어진 군은 119개 군이나 된다. 동리 또한 대폭적으로 통폐합되었다.
이런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하동군에도 새로운 지역이 편입되어 구역이 확장된다. 즉 인근에 있던 곤양군(昆陽郡)의 대부분은 사천군(泗川郡)에 편입되지만, 곤양군의 서면(西面)과 금양면(金陽面)만은 하동으로 편입되어 면 수가 23개로 늘어난다. 그러나 면리 통폐합 조치로 결국 면 수는 23개에서 14개로 대폭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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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면, 화개면, 청암면, 금양면 등은 대체적으로 이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후 1929년에는 가종과 옥동면을 합하여 옥종면(玉宗面)이 되었고, 1933년에는 금양면과 남면을 합하여 금남면(金南面)이 되어 면 수는 모두 12개로 축소되었다.
[사회 경제적 변화]
하동의 행정 구역이 확장되면서 인구도 늘어난다. 원래의 하동 호수는 8,844호였는데, 1907년에는 새로 편입된 7개 면의 호수 3,284호가 더해져 1만 2128호가 되었고, 인구는 5만 5511명이 되었다. 1914년도에는 2개 면이 새로 편입되어 인구가 조금 더 늘었다.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 1930년에는 하동 총인구가 9만 242명으로 파악되었다.
이중 경제 활동 인구는 4만 2142명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아 3만 2671명이었다. 다음으로는 어업 인구가 많아 1,493명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섬진강과 바다를 끼고 있었던 지리적 요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1930년 당시까지도 하동 인구의 대부분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 방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257명, 목죽 세공업이 346명, 상업이 1,392명, 접객업이 721명이었고, 노약자를 낀 무업자(無業者)도 4만 7996명에 달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하동 지역은 사회·경제적으로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 급격하게 편입되면서 기형적인 사회 구조를 갖게 된다. 이러한 식민 체제를 안고 갑자기 찾아온 해방을 맞이하자 식민지 모순이 자주 민주 독립 국가 건설에 큰 장애가 된다.
[민족 운동의 전개]
1. 하동의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3·1 만세 운동은 이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하동에서도 3월 13일 정세기(鄭世基) 등의 주도로 하동시장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3월 21일에는 횡천면 여의리에서, 다시 4월 3일에는 북천면 직전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옥종면에서는 3월 24일 안계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진교면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고전면에서는 4월 6일, 화개면에서는 4월 11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청소년들도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
하동의 민족 지도자들은 “최후의 1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과 난거는 행치 말고 인도 정의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라고 대한 독립을 외쳤다. 하동독립선언서의 일부 내용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하동 지역의 박치화 등 12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3·1 운동 당시 하동군 내에 배포되어 3·1 운동의 기치를 드높였다.
2. 민족 저항 전선의 확대
3·1 운동은 일제의 무단 통치를 후퇴시켰으며, 전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민족 저항 전선의 확대를 가져왔다. 1919년 백산상회 하동지점 설립, 사회주의 운동, 청년 운동,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연합 전선인 신간회 하동지회 결성 등 활발한 민족 저항 전선을 형성하였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최준, 최태욱, 윤현태, 윤상태, 강복순 등 영남의 대지주를 주주로 하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이때 하동에서는 지주 정재완, 문영빈 등이 출자하여 대주주가 되었다. 김기완은 백산상회의 하동지점격인 남일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적인 수색, 감금, 고문, 장부 검열 등 갖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폐업하였다.
1925년 4월 말 하동에서는 청년 운동·노농 운동을 전개하던 김기완과 김계영(金桂榮) 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상 단체인 정진회(正進會)가 창립되고, 1927년 8월경에는 하동사회과학연구회가 결성되었다. 하동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은 1932년까지 지속되었다.
1927년 10월 11일, 하동읍 출신으로 마산지회 설립을 주도했던 강우석과 서울에서 초빙된 이관용의 지도로 신간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신간회 하동지회는 10월 20일 하동청년동맹회관에서 설립되어 1931년까지 약 4년 간 활동했다. 신간회 하동지회는 문자 보급 운동과 야학 운영, 강연회 개최 등 문화 활동을 주로 하였다.
하동 청년 운동의 상징적 유적으로 하동청년회관이 있다. 이 회관은 3·1 정신을 계승하여 민중 계몽, 독립 정신 함양 등 향토의 국민 교양 강좌의 장소를 마련하고자 1926년 하동 청년들이 앞장서서 건립하였다. 이 청년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