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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학묵 이장이 들려준 마을연극의 추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C040202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현재 동원1리 이장을 맡고 있는 조학묵(현재 61세) 이장님으로부터 동원리 원골마을에서 오래전에 공연하였던 마을연극에 대하여 그 자취를 더듬어 본다.

지금부터 50~60여년 전의 일이다. 원골마을 주변에 난장이 서면 씨름을 하여 동네사람들이 이겨서 매번 소라는 소는 모두 원골로 타왔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칠석행행사(오늘날의 사물놀이)는 큰 장대에 기를 매어달고 하였는데, 그 당시 이웃마을 사람들이 원골 깃대에 절을 하고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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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조학묵 이장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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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조학묵 이장님 사진

단오날에는 산골 정주나무에 그네를 매어 마을 처녀와 아주머니들이 길게 딴 댕기머리와 낭자를 틀고 모여 누가 높이 뛰는지 서로 놀이를 하였는데, 이장님의 기억으로 지금은 60대가 되신 할머니들이 그네뛰기로는 전성기였다고 한다.

칠월 칠석이 오면 두레놀이를 하였는데, 커다란 깃발(무명 천에 먹으로 용 한 마리를 그림)을 동네 앞 유구천 둑에 내걸고 풍물을 치며 은구뜰의 동네사람들 소유의 논만 단체로 김을 매어나갔다. 김을 맬 때 앞에 선 사람이 선창을 하면 ‘얼싸 좋다, 잘 넘어간다’라고 하며 노래를 하며 일을 하곤 했다고 한다.

칠석날과 정월대보름에는 집집마다 다니며 지덕을 누르는 풍물패놀이를 하였는데, 그 날 집집마다 정성으로 내놓은 쌀 등이 동네의 공동경비로 사용되었다. 그 무렵 조학묵 이장님이 여섯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주민의 마당으로 동네 연극을 구경하러 갔던 기억이 처음 원골마을의 ‘예술행사’였다고 한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내용은 잘 몰랐지만, 아련한 기억에 마당쇠가 마당을 쓸고 있는 장면과 수염이 하얗게 난 할아버지, 머리에 탕건을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던 모습, 여자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던 장면 등이 떠오른다고 하였다. 아마도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역할까지 하였음으로 가발을 구할 수 없어 흰 수건을 쓴 것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그 뒤로 마을 주민 이부영(현재 60대 중반)씨 또래들이 10대 후반 때 연극을 주도하였는데, 이부영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고 한다. 그 후 조학묵 이장(현재 61세)의 또래들이 동네 연극을 하였는데, 벌써 40여년이 지난 일이다. 그 당시 대본은 어디서 빌려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연극의 지휘는 여전히 이부영씨가 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학묵 이장님의 친구들은 꼴을 베러 갈 때나 논밭 일을 하러 갈 때도 나누어 받은 대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쉴 때마다 대사를 외우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그 대본은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게 보였던 것이 인상 깊게 기억난다고 한다. 연습은 주로 밤에 저녁밥을 먹고 동네 넓은 마당에서 하였다. 대본은 이부영씨가 일일이 펜글씨로 베껴서 출연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생각이 난다.

연극의 장소는 구준회씨 댁 앞마당(현 마을회관 뒤편)이었다. 당시 원골에는 직조를 많이 하여 실 궤짝이 많아 그것을 밑에 바치고 그 위에 동네 집 대문을 떼어다가 얹고 멍석을 깔아 무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무대장치는 그림에 재능이 있는 마을 주민 이문형씨가 그렸고, 문은 동네 어느 집에 있는 문을 떼어다가 달고 마루와 담장 흙담에 돌을 그린 그러한 형식이었다. 막이 오를 때면 징을 치고, 막간의 사이에는 누군가 막이 끝났음을 소리치곤 하였다.

당시 이 마을연극은 동네 사람들 뿐 만 아니라 인근 동네에서도 많이 구경을 와서 대성황을 이루었고, 무대변경시간에는 노래 잘하는 주민이 막간에 나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대사를 잘못 외우는 친구들은 잠시 나오는 짧은 역할을 맡았고,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대사가 너무 길어 다 못 외우는 경우에는 무대 뒤에서 대사를 작은 소리로 읽어주주면 받아 말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분장은 당시 마을의 누님(현재 60대 중반)들이 맡아주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대사는 “우리 동네에 살인강도가 나타났다!”와 “깨져다! 깨졌다! 달걀이 깨졌다!” 등인데, 이장님 친구들에 의하여 40여년전에 공연되었던 이 연극이 원골의 마지막 연극이었다. 당시 연극에 참여했던 이장님이나 친구들의 기억 속에 연극의 내용이 정확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연극의 제목은 ‘애정산맥’이었고, 대체적인 내용은 어느 마을에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생은 경찰이 되고 형은 무슨 연고로 살인강도가 되어 마지막에 동생의 손에 잡혀가는 슬픈 이야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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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마을 연극 공연

원골마을의 연극의 시작은 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골마을의 조인묵 어른의 친구분들인 고 윤화중, 이지형, 이태형, 이필화씨 등이 20대 나이로 혈기왕성하였을 때 동네 연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억나는 연극으로는 ‘장한몽’, ‘춘향정’, ‘이수일과 심순애’ 등의 제목이 고령의 노인들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동네 연극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자료나 구술자료를 구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이렇듯 원골마을의 예술공연이 70여년 전부터 시작되어 40여년 전까지 연극공연 형태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2000년대에 들어 ‘예술과 마을’ 행사를 원골 주민 스스로 준비하고 주관하는 오늘의 모습으로 계승 발전된 발판이 되고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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