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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일을 도맡아온 조창묵 동계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C040102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원골에서 한평생 70년]

현재 원골마을 동계장인 조창묵(70세) 할아버지는 원골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70년을 살아오신 분이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이장직을 맡아 마을을 위하여 일하셨고, 현재는 동계장을 8년째 해오고 계신 조창묵 할아버지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할아버지의 살아온 일생을 정리해 본다.

조창묵 할아버지는 1938년(무인년)에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원골마을의 대표적인 성씨인 풍양조씨 남원공파의 후손으로 5대조가 약 300여년 전에 원골마을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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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세보

원골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평범하게 보냈으며, 6·25전쟁 직후인 15세 때에 신풍중학교(당시에는 고등국민학교라고 불렀다고 함)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할아버지가 보여준 오래전 빛바랜 사진에서 당시의 모습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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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신풍중학교 마곡사 소풍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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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신풍중학교 제4회 졸업 앨범

조창묵 할아버지는 10대 후반시절 ‘봉사대’라는 이름의 청년모임을 했었던 기억을 말해주었다. 봉사대는 주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서 주로 동네에 일이 생기거나 도울 일이 있을 때 봉사활동을 하는 모임이었다고 한다.

봉사대로 활동하였던 일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현재의 콘크리트로 가설된 동원교가 설치되기 이전에 유구천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였었는데, 1950년대 말경에 할아버지도 나무다리를 건설하는 일에 봉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고 한다. 멀리 신풍면 소재의 쌍대리까지 가서 큰 나무를 베어 옮겨와서 유구천에 나무다리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조창묵 할아버지는 1957년 19살에 결혼을 하였다. 당시 서복례(한산 서씨) 할머니는 20살로 9월에 청양에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서복례 할머니는 시집온 다음해인 1958년 정월부터 집에서 직조일을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수직기 1대와 직조용 실을 외상으로 구입하여 할머니가 직접 직조를 하였다. 처음에 1대만 놓고 직조를 할 때에는 할머니가 직접 직조를 하였고, 수직기 1대 놓고 시작해서 3대까지 늘었다. 3대로 기계가 늘었을 때는 우성에서 공녀를 2명 데려가 직조를 계속하였다.

조창묵 할아버지는 22살에 군에 입대해서 25살에 전역을 하였다고 한다. 군복무는 강원도 원주에서 하였다고 하는데, 군복무 당시의 사진을 통해 할아버지의 젊었던 군인 시절을 간접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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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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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묵 사진

그리고 조창묵 할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가족사진 중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친 회갑잔치 때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1970년에 마을 잔치를 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약 37년 이상이나 오래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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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조창묵 동계장 모친 회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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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조창묵 동계장 모친 회갑연

할아버지께서는 슬하에 6녀 2남의 8남매를 두어 모두 출가하였다. 현재 자녀들은 서울·경기 지역에 딸 4, 아들 2 살고, 천안과 공주에 각각 딸 1명씩 거주하고 있다.

[마을과 함께해 온 역사]

조창묵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원골마을의 역사와 이장과 동계장으로 마을 일을 맡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창묵 할아버지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2년간 동원리 이장으로 마을일을 맡아 보았다. 그 당시 스님 한분에게 전해들은 원골마을의 풍수와 관련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하루는 마을입구에서 스님 한분이 마을의 산세에 대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스님에게 “무엇이 이 동네에 나쁜 기운이 있어서 두런대십니까? 내가 이 마을 이장인데, 도움이 되도록 알려주십시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보니까 이 동네는 산세가 좋다. 그런데 기운이 굉장히 억세다. 이 동네 황소 먹이냐?”라고 되물었다. 원골은 예전부터 물이 세어서 황소를 먹이지 못해왔기에 “황소를 못먹입니다.”라고 답하자, 다시 “이 마을에 점쟁이나 침을 놓는 의원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이 동네는 기가 세어서 그런 사람들이 활동할 수 없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원골마을은 뒷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한가운데를 시냇물로 가로질러 마을 앞 유구천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마치 산꼭대기에 여자가 앉아서 오줌을 누는 형국이라 그것이 마을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마을의 어른들이 마을 안쪽에 정주나무를 두 그루 심어놓았다. 암수 두 그루를 결혼시키는 식으로 서로 말아서 심어놓았었는데, 정주나무 두 그루를 심은 이유는 결국 마을의 센 기를 잡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현재는 한그루의 정주나무만 서있다.

또한 원님이 있을 때 탑을 세운 이유도 동네의 기가 세어서 탑으로 막아주어야 동네 사람들이 살지, 그렇지 않으면 기가 세어서 사람들이 살수 없어서 탑을 세워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원골마을은 산세가 좋긴 하지만 기가 너무 세어서 마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므로 과거에 조상들이 정주나무를 심고 탑을 세워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었던 것이다.

그 때 스님이 당부하기를 “탑제와 나무제를 지내는가? 정주나무와 탑을 잘 위해라”라고 하였다. 탑제는 한동안 탑이 위치한 밭을 경작하던 할머니에 의해서 지내오다가 중단되었고, 그 이후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갑자기 여러 명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마을 전체 회의 끝에 예전 스님이 탑과 정주나무를 잘 위하라는 당부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10여년 전에 탑제가 부활되었다. 현재는 마을에서 탑제와 나무제를 지내고 있는데, 매년 정월과 10월 보름에 2회 지내오다가 2002년부터는 1년에 1회로 축소하여 음력 정월 보름에만 탑제와 나무제를 지낸다.

그리고 지금 원골마을에서 개최해온 예술제의 시작도 조창묵 할아버지가 이장을 맡아 보았던 1993년에 미술가 임동식과 함께 시작하였다. 그때만 해도 이장 일을 하면서 예술제 행사를 새롭게 시작하느라고 굉장히 바쁘고 힘들었다고 기억하였다.

당시에는 마을주민이나 조창묵 할아버지 본인이 작품을 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0년부터 예술제가 마을주민들이 직접 준비하고 개최하게 되면서부터 최근에는 예술제 행사 때 꽃신 등 여러 점의 작품을 내었다고 한다. 겨울이면 예술제를 미리 준비하면서 마을회관에서 짚신, 삼태기, 멍석 등을 만들기도 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창묵 할아버지가 동계장을 맡아보는 원골마을 동계는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계가 크게 운영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원골마을신풍면 관내에서 풍물을 제일 잘하고, 두레도 왕성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이 한분씩 돌아가시면서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하여 풍물과 두레는 점차 쇠락해져서 현재는 풍물이나 두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조창묵 할아버지의 기억에 원골마을에는 할아버지가 30대 초반이었던 40여전까지 풍물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나뭇가지를 두드리면서 풍물의 장단을 배우곤 했다고 한다.

원골마을 동계는 다른 마을의 대동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마을 주민들이 회원이며, 새로 이사를 오면 돈이나 쌀을 내고 회원 가입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요즈음 마을에 새로 이사 오는 경우는 전혀 없기에 신입회원은 당연히 없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동계에서 하는 일은 마을 질서를 바로 잡고, 마을에 초상이 나면 장례와 관련한 일을 맡아서 한다. 또한 마을의 중요한 행사인 탑제와 나무제를 주관하며, 특히 동계장이 제주가 되어 탑제와 나무제를 지낸다. 또한 동계에서는 마을예술제도 주관한다. 마을예술제는 동계에서 전체적인 행사를 주관하면서 운영위원장과 총무를 각각 선임하여 구체적인 예술제 행사를 담당하도록 한다. 그동안 예술제 운영위원장은 마을이장이 맡아서 행사의 준비부터 행사주최와 진행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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