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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터줏대감 여주이씨와 풍양조씨 사람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C020203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성봉현

현재 동원1리에 살고 있는 78가구 178명의 주민들 가운데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성씨는 여주이씨와 풍양조씨 사람들이다. 여주이씨는 16호에 37명이 거주하고 있고, 풍양조씨는 10호에 22명이 살고 있다. 이 밖에도 평강채씨, 공산이씨, 전주이씨, 덕수이씨 등이 살고 있다.

원래 동원리 원골에는 공산이씨가 먼저 입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동원리 원골마을에는 공산이씨는 한가구만 살고 있다. 따라서 공산이씨보다 입향이 조금 늦었지만, 나중에 번성하여 현재 마을주민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성씨는 여주이씨와 풍양조씨이다. 이 두 가문의 사람들은 동원리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원골마을의 입향시기가 오래된 가문의 사람들이다.

[여주이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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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이씨 묘소

2005년에 간행된 『신풍면지』에 동원리의 성씨 가운데 여주이씨 가문에 관하여 입향 과정과 정착 등을 자세하고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여주이씨 가문으로 원골마을에 처음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은 이만령[1658~1725]이다. 이만령은 신풍지역 여주이씨 입향조인 이지화의 손자로 어떤 연고로 동원리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서쪽으로 유구천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는 산정리가 여주이씨의 대표적인 종족마을임을 생각한다면, 여주이씨가 번창하면서 가까운 이웃 마을인 동원리로 분가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주이씨들이 신풍지역에 입향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주목되는 인물이 이산해의 외손인 여주이씨 함양공파인 풍곡 이지화[1573~1628]와 사포 이지천[1589~ ? ] 형제로 경기도 수원에서 입향하였다고 한다.

이지화는 1579년(선조 12)에 17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함양군수·예산현감·임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지화의 후손은 수원파의 종가로 그 지파에서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과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을 배출하였다. 여주이씨들은 해마다 신풍면 영정리 제각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수원에서까지 후손들이 온다고 한다.

동생인 이지천은 1619년(광해군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단천군수·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명가필보』에 친필이 실려 있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으며, 1659년 여주목사로 재직할 때 「계룡산 갑사사적비문」(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를 짓는 등 공주에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여주이씨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신풍면소재지인 산정리 일대였다. 이지화가 신풍에 와서 조씨를 만나 혼인하였고, 8형제를 두어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조씨 부인을 만났다는 사실로 보아 이미 이곳에 살고 있던 조씨 집안과의 혼인관계도 입향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풍양조씨 가문]

『신풍면지』에 풍양조씨 가문의 입향 과정과 정착 등도 소개하고 있다. 원골마을에 두 번째로 많은 성씨인 풍양조씨는 경기도 광주에서 15세손인 중려가 신풍지역과 가까운 사곡면 해월리에 입향하면서 공주지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중려의 증손인 만기가 원골마을의 입향조이다. 입향 사유는 여주이씨와 마찬가지로 본가에서 분가한 것으로 보인다.

원골마을의 풍양조씨는 남원공파가 오래전에 먼저 입향하였고, 회양공파가 나중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에 크게 세도를 떨친 가문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렇게 조선조에 명성을 날린 풍양조씨는 근대에 와석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한말의 격동기에 나라와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다. 항일투쟁에 앞장선 조정구(趙鼎九), 조완구(趙琬九), 조동석(趙東奭)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정구고종 때 한입합방 조서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자결하려다 실패하였다고 한다. 조완구는 군수로 재임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간도에 갔다가 상해임시정부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조동석은 경북 상주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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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남원공파 묘소

최근에 남원공파 선조의 합동묘역을 사곡면 해원리에 조성하여, 현재 동원리 민파골에는 18대 조성년(趙星年)부터 그 아래 20대까지의 묘소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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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학묵 이장

한편 풍양조씨 회양공파는 원래 부여군 장암면 덕림동(德林洞)에 주로 세거하였다고 한다. 이후 공주군 이인면으로 이거하여 살다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이인에서 원골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체적인 입향사유는 이인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었는데 이인지역은 농민군이 드센 지역으로 농민군을 피해서 조운응(趙雲應)이 이인면에서 원골로 입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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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리 - 풍양조씨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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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명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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