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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골마을에 전해져오는 전설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C020104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원님 전설]

『한국지명총람』에 옛 신풍현이 있던 터이기 때문에 원골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원골은 ‘원님이 살았다’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동원리 원골에는 원님에 대한 전설이 3가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마을의 조장하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첫 번째 전설은 옛날 원골에 원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원님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원님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난 것이다. 돌아와서 이것을 알고는 원님이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하는 전설이다.

두 번째 전설은 옛날 마을 가운데 있는 3층 석탑 위에 금으로 된 새가 살고 있었는데, 그 새가 탑에서 떠나 버리면 항상 원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전설은 원골에 원님이 살았다는 마을이라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동고암산의 금돼지 전설이 『신풍면지』에 소개되어 있다. 원골 동고암산에는 천년을 살며 조화를 부리는 금돼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금돼지는 가끔 원골마을로 내려와 인간으로 변신하여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한번은 배를 파는 장사가 있었는데, 사람으로 변신한 이 금돼지가 배 장수에게 값을 물어본 후 “내가 배를 먹을테니 값을 계산하시오.”라고 말한 뒤 순식간에 54개를 먹어치우고는 값을 치르고 돌아갔다. 배 장사는 좋아라고 돈주머니를 열어보니 낙엽이 가득 들어 있어 깜짝 놀란 배장사가 관아에 신고하니 사또는 “또 당했구나.”하고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민들에게 주는 피해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새로운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자녀를 한명씩 납치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원님이 부임하기만 하면 이 금돼지는 온갖 조화를 부려 사람으로 변신하여 원님의 자녀 한명씩을 납치해서 동고암사 깊은 골짜기에에 있는 굴로 데려다가 온갖 잔일을 시키며 데리고 사는 것이었다.

관아에서는 방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어도 금돼지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퍼지자 이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담력이 세고 힘을 잘쓰는 장수를 골라 이 고을 원님으로 제수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로 부임한 원님은 관속들을 모아놓고 금돼지 일을 상의한 후, 명주실 삼천 발을 구해오도록 하여 자신의 아들 발목에 매어 두고 같이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이윽고 한밤중에 갑자기 “휘 이”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도 안개도 아닌 것이 방을 채우더니 아들이 사라지며 명주실이 자구만 풀어졌다. 원님은 다음날 명주실을 따라 가니 원골 뒷산의 굴에 이르게 되었다. 그 굴속을 살펴보니 지난 밤 사라진 신임 원님의 아들과 함께 예전 원님의 아들들까지 모두 5명이 있었다. 원님은 그들에게 금돼지가 무서워하는 것을 알아내도록 하니, 금돼지는 사슴 가죽을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슴으로 만든 인장주머니를 앞세우고 뛰어가니 과연 금돼지가 꼼짝 못하여 사로잡을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하여 원골은 금돼지의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일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 바로 원골 3층 석탑이란 전설이다.

[인물관련 설화]

인물과 관련하여 첫 번째 이야기는 ‘송터(宋터)’와 관련된 설화이다. 송터는 유구로 이어지는 32번 국도에서 바라보면 동원리 원골마을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에 송씨 부자(富者)가 살던 터로 전해지는 곳이다.

조선 말기에 전라도에서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위해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여기를 지날 때 사람들 중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병이 나서 한발자국도 거동을 할 수 없어 몇일을 묵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송씨의 병색은 심해졌고, 과거 날짜가 다가오자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송씨만 여기에 남겨두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과거보러 한양에 가느라 가져온 돈으로 송씨는 이곳에서 머물며 병을 치료를 했지만, 동료들이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이곳을 들렀을 때도 송씨는 병석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동행하였던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기를 과거는 다음기회에도 있으니 낙심하지 말고 병이나 고치라고 하였다.

한편 원골의 풍경에 반하여 눌러 앉을까 생각하던 중 동료들이 모두 가버리자 고향에서 과거보러 간다고나온 자기가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쑥스러워서 그는 이곳에 눌러 앉기로 하였다. 그이 병은 오랜 세월이 흘러 조금씩 좋아져서 결국 완쾌되었다. 그는 책 대신 삽과 괭이를 들고 논을 일구고 밭을 만들었다.

어느덧 10년이 흘러 그와 함께 과거보러 갔던 동행인들은 큰 벼슬에 올랐다. 그는 벼슬 대신 원골에서 색씨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고 재산을 모아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아들 딸을 낳아 재미있게 살면서 가끔 벼슬길에 오른 친구들을 찾아가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

이후 오랫동안 마을에서 제일 부자로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에 곡간창고에 큰 불이 나서 재산이 유실된 후 송씨도 사라져 버렸다. 송씨와 동행한 이들의 자손들이 벼슬을 버리고 독립투사가 되었듯이 송씨의 자손들도 그러 했으리라 라는 후문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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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터

두 번째 이야기는 유구 부자 오참봉과 관련한 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곤충 목공예가로 원골에서 활동하고 있는 채수범이 전해준 이야기이다.

원래 채수범의 조부인 채규성(蔡奎成)은 예전에 원골에서 가까운 유구 부자 오참봉 땅의 마름을 맡아 보았다고 한다. 오참봉 집안의 땅을 관리하면서 가족 친지들이 오참봉의 땅을 경작하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채수범은 조부인 채규성에게 전해들은 유구 부자 오참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유구에 오참봉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었다. 오참봉은 공주군 내 최고의 부자로 손꼽힐 만큼 많은 땅과 재산을 소유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오참봉의 아들이 원골에 놀러왔다가 3층 석탑 위에 봉황새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활로 봉황새를 쏘았다. 화살을 맞은 봉황새는 하얀색 피를 흘리면서 유구에 있는 오참봉 집까지 날아가서 안마당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오참봉 가문의 남자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결국 오참봉 가문이 몰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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