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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4010005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인수

사람은 누구나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각각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기나긴 여정을 치르고 난 후에 죽음을 맞이하여 땅 속으로 묻히게 된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서 전해오는 관혼상제를 중요시하는 생활상이 펼쳐져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혼상제의 의례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며 그 절차가 까다롭고 이론이 많은 것이 상례이다. 상례란 육신을 떠난 영혼이 무사히 영(靈)의 세계로 귀환하는 데 필요한 의식절차를 갖춤으로써 그 영혼을 전송하고 영혼의 음조(陰助)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사회계층에 따라 유교식·불교식·그리스도교식·무속이 혼합된 상례절차가 관행되어 왔으며, 이들 상례는 오늘날 서로 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내산리에서 벌어지는 장례 절차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장례가 치러진 곳은 ‘내산 1구’라고 표시되어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안길 끝에 위치한 故 오종우 씨 댁이었다. 발인 날짜가 4월 6일 금요일이었는데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모여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고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장례는 고인이 다녔던 내산감리교회 이병일 담임목사의 집례 하에 추모 예배로 진행된다고 하였다.

[추모 예배]

고인에 대한 추모 예배가 시작되기 전 집안에서는 임종식의 마지막 부분이 진행되었고, 유족들은 늦게 찾아온 조문객들까지 성실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집 앞마당에서는 중앙에 병풍을 세우고, 그 앞에 하얀 바닥 천과 돗자리를 깔면서 동시에 병풍 중앙에 작은 상을 놓아 고인의 유품을 올려놓았다. 그 상 옆에는 성경책 한 권도 같이 놓여 있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인 장지로 매고 갈 꽃상여는 병풍 바로 왼편에 놓여 있었다.

안에 있던 고인의 영정 사진과 고인이 잠들어있는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천으로 덮인 관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들려 나와 꽃상여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추모 예배가 시작되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고인의 영정을 중심으로 유족과 고인의 주변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예배 순서에 따라 찬송가도 부르고 목사님의 성경 말씀도 들으면서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고인을 떠나보내는 유족들의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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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종우 여사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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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을 들고나오는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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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상여 앞에서의 추도예배

[운구 행렬]

약 30여 분 동안 진행된 추도 예배가 끝나고 운구(영구를 운반하여 장지까지 가는 것) 행렬이 시작되었다. 장지는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거리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의 연반 청년회 회원들이 나와서 상여를 매기 시작하였다. 요령잡이(상여를 맬 때 앞에서 종을 치며 상여소리를 내는 사람)가 이동함과 동시에 꽃상여를 맨 연반 청년회 회원들도 요령잡이의 이동 속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주는 운구 행렬의 맨 앞에서 고인의 영정 사진을 들고 이동했다. 운구 행렬 중간에 노제를 지내면서 유족들이 준비한 음식을 상여꾼들과 행렬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전통 풍습도 잊지 않았다.

운구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포크레인 한 대가 묫자리와 묘비를 세울 자리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묘소 자리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서 무덤 외관을 덮을 떼를 파기 시작했다. 젊은 층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바꿔가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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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행렬

[하관식]

이후에 바로 하관식(下棺式)이 진행되었다. 추모 예배 형식으로 간단한 식순에 의해 진행되고 난 후에 관을 묘소로 옮기고 곧바로 취토(取土: 열어놓았던 횡대를 다시 덮고 관 위에 흙을 덮는 것) 작업이 시작되었다. 유족들이 울면서 삽으로 흙을 퍼서 관에 묻을 때마다 주변 분위기는 다시 한 번 숙연해졌다. 사람들이 퍼내는 삽과 포크레인을 동원하면서 취토 작업이 끝난 후 곧바로 성분(成墳: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것) 작업이 이어졌다. 한 쪽은 퍼왔던 떼를 나르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묻는 작업이 계속되었는데 작업하는 중간에 작업을 하지 않는 주민들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유족들을 위로해주고, 부녀자들은 계속해서 음식을 날라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성분 작업이 다 끝나고 나서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고인의 묘비는 내산리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교 의례와 관련된 글을 써 주시는 분으로 유명한 강태연 선생님이 써 준 것이라고 한다. 이 분은 본관이 진주로, 여든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유교의례와 관련된 일은 어디든 가신다고 선생님의 아드님께서 말씀하셨다.

묘비 세우는 일이 마무리되면서 공식적으로 행한 장례 절차의 모든 의식이 끝났다. 산에서 내려온 후 집 옆에 바로 식당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일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들어온 사람들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유족들은 마지막으로 묘비, 묘테, 잔디 등 묘소 주변 정리를 하고 명절날 첫 성묘 때를 대비하여 마무리 작업을 한 후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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