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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농촌의 현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3020001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을경

[고난의 시절]

내산리도 다른 농촌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마을의 유래와 내력을 알만한 자료들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구체적인 사실들은 그 아픔만큼이나 미약하다. 일제강점기 내산리가 처한 현실은 다른 마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일본의 수탈과 그로 인해 만성적인 기근이 초래된 데 대한 분노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강화된 공출은 농민의 불만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소극적인 대책이라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영세한 농민들은 미곡공출에 대항하여 집안의 헛간이나 뒤뜰에 쌀독을 묻어야 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를 묻을 때에는 내용물이 상하거나 썩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특히 쌀을 그대로 묻으면 쉽게 상하기 때문에 볍씨를 묻어야 한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해방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던 고학석씨(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땅 속 단지에 묻은 말린 볍씨는 3년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무 탈 없이 넘길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공출량을 채우지 못하면 혹시 숨겨둔 쌀이 있나하고 집안을 수색하였는데 대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땅 속을 찔러가며 묻어둔 쌀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풍물의 수난]

일제강점기에는 풍물도 수난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풍물이 곁들여져 상부상조하던 두레의 풍습은 부역이라는 강제노동으로 변모하였고 두레풍물은 식민지정책의 일환인 농업수탈정책에 이용되어 노동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단순한 반주나 눈요기 거리로 전락하였다. 또한 사당패의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선농악대에 흡수됨으로써 고유의 민중문화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갔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은 풍물을 낭비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민족문화로 성장할 길을 차단하였다. 현장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어 온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명칭만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하여 노동의 향상을 위한 기능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였다.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는 그때 왜놈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군수물자로 헌납하라고 동네의 악기는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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