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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2020005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난영

내산리 남산골에는 어린 나이로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안동권씨 동흥군(東興君) 권상(權常)의 6세손인 권세헌(權世憲)의 딸이다.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 말이 적고 조용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권씨가 내산리에 살고 있는 강화최씨 최백복[1733~1753]에게 시집을 오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맏며느리다운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칠거지악이라고 했던가, 조선시대에는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 행실이 음탕하고, 투기를 하거나, 몹쓸 병을 지니고 있다거나, 말이 지나치게 많고, 도둑질을 하는 따위의 경우가 칠거지악에 해당됐다. 하지만 그녀는 시부모를 친부모와 같이 정성을 다해 섬겼으므로 효부라는 칭찬이 고을에 자자했었다. 182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채홍운(蔡弘韻)이 쓴 그녀의 행장(行狀)에도 ‘덕행이 조용하고 얌전하며 언어가 간결 묵중하더니 시부모를 섬김에 공경을 다하여 친부모를 섬김과 같이 하니 향당에서 효부라 칭송하였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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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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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정려 현판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최백복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에는 최백복의 사망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데 최백복의 8세손인 최재홍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도 어렸을 적에 들었다고 하면서 말씀하시는디 나도 할아버지에게 들었지. 그러니께 백자 복자되시는 어른이 당시 과거를 보러 가셨다는 거여. 아, 그런데 돌아오는 중에 객지에서 돌아가신 모양이에요. 청천벽력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쯧쯧,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한 끝에 겨우 시신을 찾았다는데 아주 여러 날이 걸렸다고 하시더라고...”

그녀에 대한 기록에는 1753년 음력 9월 21일 남편이 죽어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중에도 시부모에게 죽을 끓여 드렸다고 적고 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그녀는 뱃속에 아기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한 통의 언서(諺書)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씨는 당시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숨을 거두기 전 남편의 유모를 불러 아들을 부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은 까닭은 혹 뱃속에 아이가 있을까 걱정되어 그랬으나 이제 확연한 증거가 있어 바랄 것이 없으니 내가 오래 살아 세상에 남은들 무엇 하겠는가? 3년 동안의 제사와 몇 살 난 어린애가 마음에 걸리지만 위로 부모가 계시니 제주가 있고 또 의탁할 곳이 있다. 정리(情理)가 여기에 미치니 비록 슬픔은 쌓이지만 남편과 더불어 같은 해에 죽어 같은 날 땅에 들어가는 것이 나의 바람이니 다시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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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 - 안동권씨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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