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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거리의 주인공 청백리 이세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2010003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선빈

내산리 마을회관 에서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면 4기의 비석과 만나게 된다. 1기는 이상한 모양의 돌이라 하여 괴석(怪石)이라하고 그 옆에 괴석의 내력을 담은 비석이 있다. 방형의 화강석 위해 93㎝의 높이로 세워져 있는 이 괴석은 전주이씨의 부전동 입향조인 이세장과 관련이 있다.

부전동의 전주이씨는 한재 이목김수손의 사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목[1471~1498]은 조선 전기 호서의 사림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열아홉에 진사에 합격하고 스물다섯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일찍이 사림의 거두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태학생으로 있던 1490년(성종 21, 당시 20세)에 대비가 음사를 설치하고 무당을 불러들이자 앞장서서 논척하여 이를 물리쳤다. 또한 나라에 기근이 들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윤필사의 전횡 때문이라고 격렬히 탄핵하다가, 이로 인해 공주의 씨악섬(현재 공주시 소학동)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목의 공주유배는 그의 처인 예안김씨의 출신지가 공주 부전동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1세기 후 반포면 공암리에 세워진 충현서원에 그가 배향된 것은 공주에 유배당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이목은 무오사화 때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목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인 예안김씨는 당시 두 살의 아들 이세장을 데리고 친정인 내산리(경사동)로 옮겨오면서 전주이씨는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세장[1497~1562]은 151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524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장령·집의, 홍문관 교리·응교,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시강원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강원도관찰사 황주목사 등에 제수되었는데 평생 청렴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 때문에 1551년(명종 6) 염근인 33인을 녹선할 때 그도 퇴계 이황과 나란히 뽑히고 있었다. 실록에서 그에 대해 평하기를, ‘수졸(守拙)로 세상을 살아 외물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궁색하여 조석거리가 없었지만 생산에 뜻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골에 세워진 괴석은 이 같은 이세장의 청백리상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괴석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문 〈괴석명 병소서(怪石銘 幷小敍)〉(成九鏞 撰)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력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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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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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장의 괴석

“옛날 명종 때 부제학 이공[이세장]이 강원도 관찰사로 계실 때 절의와 청렴으로 정치를 잘하여 왕께서 친히 청백이란 2자를 써서 포상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관리들과 백성이 길을 가로막고 때가 무더운지라 부채를 공에게 바쳤는데 공이 이 부채를 강에 던지시니 이로 인해 그 강을 투선강(投扇江)이라 칭하였다. 부인[남원양씨]이 물레를 가지고 공을 따르니 공께서 역시 버리도록 하였다. 좌우에 시종하던 백성들이 공의 청덕(淸德)에 보답할 길이 없어 공이 평소 아끼시던 괴석(怪石)을 공의 집에 옮겨 놓았다. 공이 돌아가신 후 공의 묘정에 다시 운반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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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 - 이세장 유적과 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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