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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의 학문성향과 교유인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A01020004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선빈

[서기의 학문]

고청 서기이지함이중호를 사사했다. 이지함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문인으로, 서경덕 주기론의 영향을 받아 『주역』을 기본으로 하여 수리·의학·복서·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달통한 인물이다. 또한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했는데, 서기도 그와 함께 다닌 적이 있다. 이중호는 소학을 강조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가르침을 받은 유우(柳藕)[1473-1537]의 문인으로, 평소에 과거공부를 폐하고 도학에 전력하여 구용(九容)·구사(九思) 및 경(敬)·의(義)로 몸과 마음가짐의 규칙을 삼고, 『소학』의 실천에 주력한 인물이다. 또한 서경덕과 예설을 강론하여 칭찬을 받기도 하고, 문장에도 뛰어나 김안국으로부터 귀신이 아니면 이런 문장을 지을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심성도설〉·〈성리명감〉 등을 남겼다. 이중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소학』·『근사록』 등을 우선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서기이지함의 권장으로 이중호의 문하에서 3년간 수학했다.

이렇듯 이지함이중호에게 직접 배운 서기의 학문도 자연히 도학을 중시하였다. 이중호의 문하에서 공부한 직후인 장년기에 홍성의 고향에서 향약을 직접 시행하여 향풍을 바로잡고자 했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성격을 보여주는 한 일면이다. 비록 홍성 향리(鄕里)에서의 학문적 실천이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지리산을 거쳐 공주에 정착하면서도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공암정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성(誠)과 공(公)이라는 두 글자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 비추어, 수신(修身)을 중시하고 도학(道學)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생활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유인물]

서기가 당대에 주로 가까이 교유한 인물로는 동주 성제원, 구봉 송익필, 중봉 조헌, 남명 조식, 사계 김장생, 사암 박순, 쌍계당 송응상, 이암 송인, 정진생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절친하게 지냈던 인물은 성제원·송익필·조헌·송인 등이다. 그는 송익필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하느냐? 오직 송구봉을 보면 되느니라. 아니 나는 제갈이 구봉만 못하다고 여기노라’라고 자평(自評)하였다. 한편 그가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율곡 이이[1536-1584]·퇴계 이황[1501-1570] 등을 만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점은 그의 학풍을 이해하는 데에도 참조가 된다.

서기의 문집 문인록에는 이득윤·송이창·민재문·박희성·박희철·전승업·우강·강이·성호선·오중철·최숙·강시진·박로·이이재·민만희·민여로·이남·조몽익·박고·박대중 등 모두 20명이 올라 있다. 물론 문집이 유고의 형식으로 편찬된 것을 고려하면, 이들 문인의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20명 중에서 민재문·박희성·오중철·최숙·강시진·박로·이이재·민여로·조몽익·박설 등 10명은 공주향교 『청금록』 명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박희철이 박희성의 아우이고, 강이가 강시진의 숙부이며, 우강의 거주지가 〈사마방목〉에 공주로 기재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문인 20명중에서 13명 이상이 공주의 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기가 16세기 후반기의 공주지역 학문에 미친 영향력이 컸음을 증명해주는 예라고 하겠다.

서기의 문인 중에서 송이창·민재문·박희성 등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우선 송이창(宋爾昌)송준길의 아버지이며 송시열의 스승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기의 학문은 송이창을 통해 송준길송시열에게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이창은 스승 서기를 추모하는 제문에서 ‘선생이 계실때는 우리의 도가 동에 있더니, 선생이 가시니 우리의 도가 비었도다(先生在吾道東 先生去吾道空)’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였다. 민재문(閔在汶)은 초려 이유태의 스승이다. 그런데 이유태의 문인(269명) 중에서 52명은 〈공주향교 청금록〉에 올라 있다. 따라서 서기의 학문은 이유태라는 손제자를 통해 1세기 후의 공주지역 사림형성에 또다시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박희성(朴希聖)은 임진왜란 이후의 충현서원 중수시 원장을 하면서 중수를 주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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