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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31043
한자 申濡墓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산소골길 48-4[달산리 322-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22년 10월 17일연표보기 - 신유 묘역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신유 묘역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3호에서 공주시 기념물로 변경
현 소재지 신유 묘역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산소골길 48-4[달산리 322-1]지도보기
원소재지 신유 묘역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산소골길 48-4[달산리 322-1]
성격 묘역
관련 인물 신유
소유자 고령신씨어은공파
관리자 고령신씨어은공파
문화재 지정 번호 공주시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달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신유의 묘.

[개설]

신유(申濡)[1610~1665]의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이옹(泥翁)이다. 첨지중추부사 신말주(申末舟)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신기한(申起漢)이고, 어머니는 김영국(金英國)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6년(인조 14)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2년(인조 20) 이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집의(執義)·동부승지·우승지 등을 거쳐 1650년(효종 1)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사간을 거쳐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7년(효종 8) 대사간으로 국왕을 능멸하였다 하여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천안으로 옮겨졌다.

신유 묘역(申濡墓域)은 조선 후기 지방 사족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10월 17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기념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위치]

신유 묘역공주시 이인면 달산리에 있다.

[변천]

고령신씨어은공파에서 1980년 부지 3,305㎡[1,000평]를 매입하여 기존 건물 3동[존성재(存誠齋), 삼문, 관리사]을 해체한 다음 숭무사(崇武祠)와 외삼문, 비각을 신축하고 존성재를 복원하여 신유 묘역 주위를 정비하였다.

[형태]

신유 묘역의 정문인 북정문(北征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존성재, 우측에는 신도비와 비각이 있으며, 중앙 안쪽으로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과 함께 사당인 숭무사가 있다. 신유 묘역의 비각 안에는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좌측 비석은 6·25전쟁 때 파손되었고, 우측의 비석은 현대에 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금석문]

신유 신도비의 본래 비문은 이현일(李玄逸)이 지었고, 전액은 이동적이 썼으며, 음기는 이재익이 썼다. 복원된 비의 글씨는 이상건이 썼다.

[의의와 평가]

신유는 외교사절로서 청나라와 일본을 다녀온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특히 1647년(인조 25) 공산현감으로 부임 후 공주의 명승과 고적 10곳을 「공산십영(公山十詠)」이란 제목의 시로 만들어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주시에서는 신유의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여러 문화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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