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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97
한자 李夢鶴-亂
영어의미역 Yi Monghak'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반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596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6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홍가신|한현|신경행|동갑계

[정의]

1596년(선조 29) 충청남도 부여 및 홍산 일대에서 이몽학(李夢鶴) 등이 일으킨 난.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은 당시 국가의 권위를 상당히 실추시켰고, 백성들의 생활을 점차 피폐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흉년과 전쟁은 불안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당시 곡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나누어주던 모속관 이몽학 등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안해하는 민심을 쉽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서얼이라는 신분이 승려 등 소외받던 계층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과]

1596년(선조 29) 속모관(粟募官) 한현의 모속장(募粟將)이던 이몽학은 임진왜란이 한창일 당시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으로 부여 홍산 무량사에서 난을 일으켰다. 반란의 중심에는 이몽학이 승려들과 함께 조직한 동갑계 회원 700명이 있었으며, 전쟁 중 대 기근으로 굶주린 농민들까지 합세하였다. 반란군은 홍산현감을 가두고 이어 임천까지 함락하였다.

수천의 무리를 이룬 반란군은 인근의 정산, 청양, 대흥을 휩쓸었고, 서울로 진격하기 직전 거점 지역인 홍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을 동원해서 이를 반격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어 반란군의 분열을 꾀하였다. 결국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은 이몽학의 목을 베어 투항하였으며, 면천에서 형세를 살피던 한현도 곧 체포되었다.

[결과]

한 달 만에 평정된 이몽학의 난은 한현이 체포된 이후 33명을 서울로 압송한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당시 외방에서 처형된 자가 100여 명이나 되어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몽학의 난은 평정된 이후에도 수십 년에 걸쳐 논공행상의 문제로 분란이 일었는데, 1604년(선조 37)에 이르러서야 김경창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1등 공신, 박명현은 2등 공신, 임득의는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몽학이 규합한 세력은 일반 백성에서부터 승려, 서얼, 사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폭넓은 참여층을 한꺼번에 아우르며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난을 일으킨 조직력과 운영 능력에 대한 의문을 풀기에는 아직 많은 자료가 부족하다.

전란과 봉건적 사회의 모순 속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은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부정적으로만 평가받고 있다. 추후 다양한 연구와 자료 수집을 통해 당시 이 지역의 정세와 이몽학이 처한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전란의 구체적인 과정과 동조 세력에 대한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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