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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정리 암숫강다리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70
한자 廣亭里-
이칭/별칭 광정 강다리,강고사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걸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줄다리기
노는시기 1월 15일[음력]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에서 정월 대보름날 행하는 민속놀이.

[개설]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놀이 문화와 기원 문화의 결집체로서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지역의 광정1리·광정2리·광정3리·대산1리·대산2리·월산리·사현1리·사현2리·인풍리·내문리 등 10개 마을이 함께 즐긴 전통 민속 줄다리기이다. 남성과 여성의 직접적인 성행위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민속놀이이라서 즐거움을 더하였기 때문에 인근 마을의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가 위축될 만큼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지역은 호남 삼문의 첫 기점인 차령 아래 큰 장터인 광정장이 있던 마을이다. 공주 지역에서는 공주장과 유구장 다음으로 큰 장터요, 공주 지역과 천안 지역을 연결하는 장터로서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장이다. 광정장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업이 발달하여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이런 광정장에서 열리던 기원의 성격을 가진 마을 전체의 놀이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발 벗고 나서서 광정리 암숫강다리기 놀이에 참여하였고, 풍성한 재화는 광정리 암숫강다리기 놀이의 내용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연원]

큰 장이 열리던 광정리는 인구가 많고 재화가 비교적 풍성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특히 타지방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어 주민들 간 대동단결의 필요가 대두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광정역이 있어 삼남으로 연결되는 제일로(第一路)라는 인식에서 올리던 노제(路祭)와 마을 신앙으로서의 산신제가 있었다. 노제와 산신제를 연결하는 대동제로 광정리 암숫강다리기가 시작되었고, 상인들에게는 수입을 올리는 호기로 작용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놀이도구 및 장소]

정월 초사흘 거리제를 올리고 나서 며칠을 쉰 광정리 사람들은 정월 초이레부터 건립 풍물을 시작하였다.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를 지내려고 대동계(大同契)가 중심이 되어 1천 2백 여 단의 볏짚과 비용을 모금하고자, 3백 여 호에 달하는 광정리 지역의 모든 집을 방문하여 풍장과 덕담, 축원을 올려주는 대가로 곡식이나 돈 등의 재화와 볏짚을 얻는 걸립을 계속하였다.

볏짚 걸립 후에 광정리의 모든 장정들이 4일간 강을 만든다. 트레강이라 불리는 본강과 쥘강이라 불리는 동아줄을 꼬았으며, 트레강은 한 번에 볏짚 세 단을 대서 트는 전통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와이(Y) 자 형으로 벌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동아줄을 걸어 반대편에서는 장정들이 서까래를 돌리면, 장정 세 명이 짚단을 한 단씩 메기며 세 장정이 동시에 볏짚을 틀어주기 때문에, 단번에 지름 30㎝ 크기의 한 자 정도 굵기의 동아줄이 틀어졌다. 본강은 이렇게 만든 트레강 셋을 다시 꼬아 만들기 때문에 지름만 70~90㎝ 정도의 굵기였다.

열사흘 청소년들의 애기 강다리기에 사용하는 강으로 본강 보다 굵기는 3분의 1이며, 길이가 짧은 애기강을 만들었으며, 애기강 셋을 동아줄과 새끼로 묶어서 만든 본강을 동이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동이강은 똑같은 강을 2개로 나누어 만들며 사람들이 잡고 당길 강 발로 쥘강을 내고 머리를 만들면 본강이 완성되었다. 쥘강은 여느 동아줄과 같았으며, 몸통 부분과 꼬리 부분에 동아줄을 한 가닥씩 매어 사람이 잡고 당기는 것이 편하게 하였으며, 쥘강의 몸통 부분은 지네발처럼 늘어 뜨려 당기기 편하게 하였다.

강머리는 암숫강 모두 동이강을 원형으로 굽혀서 비녀목을 끼울 수 있게 한 부분으로 강의 머리는 90㎝ 이상의 원형 구명을 내는 작업이라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으며, 머리 부분은 사람이 올라타도 될 만큼 굵었다. 비녀목은 암숫강의 머리를 겹치고 상호 연결되도록 고정하는 기둥 나무로 적당한 굵기의 통나무를 잘라서 사용하였으며, 하나를 만들면 몇 년을 사용하였다.

대형 강을 강다리기 장소로 옮기는 일도 마을의 장정들이 모두 힘을 합해야 하는 일이었다. 강을 옮기는 일에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강을 만드는 곳이 강을 다리는 장터거리와 멀지 않았고, 때로는 장터에서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조금을 옮겨도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는 일이라서 정월 대보름 전날 아침나절이면 징을 울리고 풍장을 쳐서 사람을 모았고, 사람들이 모이면 힘을 합하여 강을 장터 가운데 길에 펼쳐 놓았다.

[놀이방법]

정초 걸립 풍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정월 열사흘 저녁부터 밝혀지는 수박등의 화려한 불빛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울과 목포 지역을 잇는 국도 23호선 도로에서 광정리까지 약 150m의 두 길에 새끼를 매고 90㎝ 정도의 간격으로 거는 등은 마을 공동으로 만들며, 개개인의 대문 앞에 거는 연등은 가가호호에서 만들기 때문에 등의 크기나 모양이 다양하여 마을 전체가 불야성을 이루었으며 등불만으로도 사람들은 들떠 올랐다.

광정리 암숫강다리기의 특징은 철저히 성적 대결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암강과 숫강이 각각 다르고 암강에는 두레에 들지 못한 어린 소년들과 여인들만이 강을 당기고, 숫강에는 성인 남자가 모두 편을 이룬다. 강을 다리기 전에 먼저 암강과 숫강을 접붙여야 한다.

암강과 숫강의 결합은 일반적인 성 행위와 같이 둥근 머리를 가진 암강에 숫강을 끼우는데 암강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숫강을 맞이한다. 강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한 규모의 숫강을 들고 암강 구멍에 숫강을 끼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어린 소년들과 여자들이 당기는 암강 편의 강다리기를 유리하게 하려고 숫강의 힘을 빼놓아야 하는 여인들은 ‘이번에는 대주자’라고 소리를 질러 놓고도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강을 돌려 교접을 방해했다.

성적 유희가 대형 민속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순간이고, 흥이라는 측면에서의 절정이기도 한 이 행위는 길면 두 시간 가까이 고생하는 숫강 수난의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접되면 비녀목을 질러 숫강이 빠지지 않게 고정하면 비로소 두 강이 하나의 줄이 된다.

이어서 성공적인 결합을 축하하는 풍장이 울리고 간단한 고사를 올린다. 그리고는 첫날의 광정리 암숫강다리기가 시작된다. 광정리 암숫강다리기의 승패는 미리 정해진 구간 밖으로 비녀목을 끌어내야 정해진다. 양쪽 구간의 폭은 대략 50자로 15m에 이르렀으며, 강을 다릴 사람이 많아 놀이가 쉽게 끝날 수 있다고 생각되면 백자 폭을 두기도 했다. 약 150m에 이르는 강을 당겨 7~15m 밖으로 끌어내는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동네 남자 중 많은 수가 풍물재비와 진행 요원으로 빠지고, 어린 소년들과 여인들은 모두 달려든다지만 힘을 겨루는데 남정네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여인들의 암강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작용했기 때문에 광정리 암숫강다리기에는 여인들이 남자들을 방해하는 행동을 허용했다. 남자들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으나, 사람이 다치는 일을 제외한 모든 행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승패가 결정 나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는 여인네들의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방해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광정암숫 강다리기의 흥미를 한층 키워주었다.

솔잎을 따서 줄을 당기는 남정네들의 몸에 바늘 침을 주고, 숫강에 발을 벌리고 걸터앉아 남자들이 힘을 결집하는 것을 방해하고, 한겨울에 찬물을 끼얹기도 하고, 아이들을 시켜 간지럼을 태우기도 했지만 그러고도 질 것 같으면 썩은 구정물을 끼얹기도 했다.

물벼락이나 바늘 침을 피해가면서 줄을 당겨야 하는 곤혹스러움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아낙네들의 싸움은 결국 정월 대보름날 자정 무렵에 승패를 가르고, 승패가 갈리면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 엿을 나누어 주면서 요란한 광정리 암숫강다리기가 끝난다. 광정암숫 강다리기는 강을 다리는데 이틀 밤이 소요된다. 그러나 승패를 겨루는 경기여서 하루에 끝날 수 있기 때문에 행사를 다음날로 연기하고자 준비하는 것이 파쌈질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많아지는 축제의 성격을 활용하여, 누군가 싸움을 하면 파한다는 재미있는 방법이었다.

광정리 고사에서는 고사 음식 자체가 복을 나누는 음식이 되고 이 중 대표적인 것은 복 떡이다. 그러나 광정리 암숫강다리기의 경우 매우 많은 인파가 이틀 동안 운집하기 때문에 고사떡을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대체하려고 만들어진 음식이 작은 양으로도 오래 먹을 수 있으며, 확실히 새로운 맛을 제공한 엿이었다. 해방 후에는 엿을 만드는 집에서 생산한 맞춤 엿으로 복 엿을 배분하였지만, 그 이전에는 대부분 마을에서 직접 엿을 고았다고 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한국의 대형 줄다리기는 거의 모두 암숫강다리기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양반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직접적인 성의 교접을 주제로 한 강다리기가 시행되었음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절구질을 하는 행위가 성행위를 연상한다 하여 시숙이나 제수씨 등의 조심스러운 이성이 있으면 삼가는 것이 공주 지역 주민들의 보편적인 정서였기에, 남녀 칠세 부동석의 개념이 남녀가 각각 다른 편이 되어 줄을 다리게 했을 것이다.

이미 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명성이 높은 당진군의 기지시 줄다리기가 기원적 특성이 강한 반면,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유희적 특성이 매우 강하여 서로 다르다. 1956년 시작된 백제문화제 개최 이전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최대의 연례 축제는 광정리 암숫강다리기이었으나, 1970년대 제3공화국의 미신 타파 정책과 주민 의식의 현대화에 밀려 사라졌다.

광정리에는 폭이 100m가 넘는 정안천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이 넓은 냇물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요,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생활의 터전이었지만,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면 갈증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홍수가 나서 제방이 쓸려 내려가면 농사를 망치고 재산을 쓸어가는 수마였다.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의 주민들은 이러한 냇물의 관리에 어마어마하게 큰 강을 활용하였으니, 그것이 보맥이와 제방 맥이었다.

강고사와 광정리 암숫강다리기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을 합하여 강을 들고 마을에서 가장 큰 보나 보수가 필요한 보로 나가 강을 걸쳐 놓고 보를 개수하였으며,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강은 마을에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 홍수에 제방이 쓸려나가면 강을 들어다가 놓고 흙을 부어 제방을 보수했다.

[현황]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민속놀이 중 가장 큰 규모로 개최되던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은 열리지 못하는 해가 많았으며, 명맥만 유지하여 오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복원되어 매년 시행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재정 문제로 격년제나 부정기적으로 열렸으며, 1970년대에는 정부의 미신 타파 운동에 따라 1972년 정월 대보름의 광정리 암숫강다리기를 끝으로 더는 열리지 않고 있다. 음력 1월 3일에 장터에서 별도로 진행하는 노제만이 계속 명맥을 유지했으나 1994년 정월의 노제 이후에는 이마저도 단절되었다.

[참고문헌]
  • 인터뷰(광정2리 주민 장기순, 남, 66세, 1998. 1)
  • 인터뷰(광정2리 주민 김동환, 남, 81세, 1998. 1)
  • 인터뷰(광정2리 주민 유병일, 남, 73세, 1998. 1)
  • 인터뷰(광정2리 주민 장주순, 남, 65세, 1998. 1)
  • 인터뷰(광정2리 주민 학선학, 남, 62세, 199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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