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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185
한자 農器具
영어의미역 Farm Machines and Implement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훈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마을에서 주로 농사를 지을 때 사용했던 기구.

[개설]

농기구는 농사 쓰임새에 따라 가는 도구, 삶는 도구, 매는 도구, 물대는 도구, 거두고 터는 도구, 알곡내는 도구, 말리고 갈무리하는 도구, 운반 도구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가는 도구]

가래는 조선가래와 왜가래가 있었다. 조선가래는 나무로 만들며 테두리를 얇게 쇠로 감싸 보호한 것이다. 왜가래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왔으며 조선가래보다 얄팍하게 만들었다. 가래질은 흔히 셋이 했다. 줄을 넷이 당기고 다섯이 하는 것은 흙을 마구 몰아낼 때 쓰며 보통은 셋이다. 가래는 삽처럼 생긴 것에 구멍을 뚫은 것을 장에서 사다가 썼다. 손잡이 장대는 약 2~3미터 길이였다.

돌이 많은 지역이라 쟁기가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되며 주로 극쟁이를 많이 써왔다. 현재도 광범하게 극쟁이를 쓰고 있다. 사용법은 왼쪽으로 손잡이를 잡고 위를 잡았을 때는 오른쪽으로 잡아 양손으로 번갈아 잡는다. 일할 때는 살짝 들어주어야 한다. 그냥 두면 무턱대고 땅으로 깊게 들어가서 소가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몸체는 소나무로 만들며 손잡이는 버드나무를 쓴다. 버드나무는 부러져도 쉽게 나무를 구할 수 있으며 잘 썩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물푸레나무도 사용하나 산에 가도 나무 구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는 쇠로도 만들며 예전에 쓰던 극쟁이는 없다. 집에서 만들기보다는 장에서 사다가 쓴다.

쟁기는 논을 갈 때만 쓴다. 조정해 놓고 쓰면 소가 지치지 않고 땅을 갈 수 있다. 조정하지 않고 쓰면 날이 땅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므로 얕게 해주어야 땅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쟁기의 수명은 10년이다. 시장에 가서 사온다. 논갈이는 쟁기가 쉽고 밭갈이는 극쟁이가 적당하다. 그러나 논도 산다랑이에서는 극쟁이를 써야 한다. 쟁기로는 좁고 가파른 산다랑이에서 소를 돌릴 수가 없는 탓이다. 따라서 산다랑이에서는 극쟁이가 금방금방 갈기 쉬우니까 쟁기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괭이는 땅을 파는 데 주로 쓴다. 괭이는 용도마다 이름이 달랐다. 조선괭이가 튼튼하다. 생김새는 기다랗게 생겼는데 그냥 괭이라고 하면 바로 조선괭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지괭이는 삼각형으로 생겼다. 날이 넓적한 것은 날을 잘 갈아서 묘를 쓸 때 나무뿌리를 쳐서 자르는데 쓰기도 한다.

[삶는 도구]

삶는 도구의 으뜸은 써래이다. 예전에는 만들어 썼으나 지금은 시장에서 구입해 온다. 삶아서 씨를 뿌리는 도구로는 오장치가 중요하다. 오장치라고 해서 짚으로 엮어 섬때기처럼 만들어서 헛간이나 방의 시렁 같은 데다 매달아 두었다가 쓴다. 오장치에는 씨앗을 담아둔다.

[매는 도구]

잡풀로는 가래풀과 방동사니가 많았으며, 그 중 가래가 가장 많았다. 풀은 호미로 제거하였으며, 제초기는 일제강점기 말에야 생겼다. 제초약은 근래 약 20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물대는 도구]

메마른 지역이라 물이 귀해서 관정을 파서 물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워낙 봉답이 많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면적골과 동적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기는 하나 가물면 물이 귀했다. 용두레는 통나무를 파서 혼자서 작업할 수 있었는데 깊은 데서는 못하고 얕은 데서 퍼냈다. 용두레는 물 사정에 따라 작업 속도가 달랐다. 서마지기 논에 물을 대려면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고리두레란 둘이 하는 것을 말하며 용두레에 비하면 깊은 물도 풀 수 있었다. 현재는 양수기를 주로 쓴다.

[거두고 터는 도구]

거두는 도구의 으뜸은 낫이다. 낫은 주로 조선낫을 썼으며 후에 왜낫이 들어왔다. 도리깨는 보리타작에 많이 쓰였다. 가볍게 도리깨를 들어올렸다 살며시 내리면서 도리깨아들로 후려친다. 도리깨비녀는 사이에 끼우는 것이다. 타작한 곡식의 검불 제거는 바람에 놓아서 그냥 바람 부는 데로 날아가게 하였다.

자리에 깔아 널면 바람에 날랐으며 키로 날리는 것보다 오히려 효과가 좋았다. 즛가래는 눈칠 때 쓰는 식으로 만들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날리면 검불이 날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터는 도구는 괘상이 으뜸이다. 통나무를 기다랗게 만들어서 볏짚을 묶어서 후려친다. 일제강점기에 홀태가 들어왔으며, 호롱기는 그 후에 들어왔다.

[알곡내는 도구]

마을에 디딜방아가 대 여섯 개 정도 있었다. 모두 개인 소유였으나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작업은 두 명이 밟고 하나가 곡식을 확에 집어넣었다. 최소한 세 명은 필요했다. 주로 낮에 작업을 했으며 벼와 보리를 동시에 찧는다. 하루 작업 분량은 두어 말 정도를 찧었다. 마을의 연자방아는 다섯 개였으며 모두 개인 소유였다.

임자 아닌 사람이 이용할 때는 자기 소를 가져가서 이용하고 한 가마니 찧는 데 얼마를 주는 식으로 해결하였다. 대개 한 가마니에 한 되를 주었다. 연자방아는 많이 찧으면 1일 약 10여 가마를 찧었다. 마을에 물레방아는 1군데 있었다. 보리와 벼, 밀을 모두 찧었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물만 있으면 찧는데, 물이 없으면 찧을 수가 없었다. 물레방아의 운영은 전적으로 물에 의존하였다. 연자방아보다는 매우 편리하였고 시간당 작업량도 월등히 많았다. 지금은 연자방아나 물레방아나 모두 사라지고 정미소에서 찧고 있다.

[말리고 갈무리하는 도구]

곡식을 너는 데는 멍석이 가장 많이 쓰였다. 벼나 보리 등을 가리지 않고 양이 많을 때 쓴다. 도래방석은 콩 같은 것과 작은 것을 너는 데 쓴다. 곡식을 보관하는 것으로는 섬, 가마니, 둥구미가 중요하다. 섬이 가장 일찍이 사라졌고 현재는 가마니도 보기 힘들다. 주로 포리에틸렌 자루를 쓰는 탓이다. 그러나 콩 등을 담을 때는 여전히 둥구미가 널리 쓰인다.

[운반 도구]

벼를 나를 때는 소 등에다 발채를 올리고 날랐다. 그전에는 길마 위에다 나무로 틀을 짜고 양쪽에 발구채라고 짚으로 떠서 만들어 썼다. 발채가 없을 때는 지게를 썼다. 지게를 이용한 바수거리는 산에서 싸리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만들어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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