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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851
한자 李參平
영어음역 Yi Sampyeong
영어의미역 Yi Sampyeong
이칭/별칭 카나가에, 月窓居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재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도공
출신지 금강[충남 공주]
성별
몰년 1655년 8월 11일연표보기

[정의]

조선시대 금강[충남 공주] 출신으로 일본 도조(陶祖)가 된 도공.

[활동사항]

공주 금강에 살던 이삼평은 도공으로 활동하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사가번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조선 철군 때 예닐곱 명의 조선 도공과 함께 포로로 피랍되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삼평은 일본의 가라쓰[唐津]에 도착하여 오기군[小城郡] 다쿠촌[多久村]에 살면서 가나가에[金ヶ江]라는 성씨로 귀화하였다.

1615~1624년에 마쓰우라군[松浦郡] 아리타향[有田郷] 미다레바시[乱橋]에 머물렀는데, 1616년 근처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를 발견하였다. 이삼평은 155가구의 도공들을 이끌며 시라카와텐구[白川天狗] 계곡 부근에 이주하여 가마를 구워 처음으로 순백의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자기질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아리타 지역은 일본 도자기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이곳에서 만든 도자기는 지명을 따 아리타 야키로 이름 붙여졌으며, 12㎞ 떨어진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일본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아리타 도자기는 반출항의 이름을 따서 이마리 야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출된 도자기는 세계 도자사의 변혁을 일으키며 일본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재패니즘을 일으켰다.

[상훈과 추모]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이 가마를 개화한 지 300년이 되는 1916년 비를 세웠다. 이삼평 비는 일본 도산신사 내에 있다. 신사에서 도조비까지는 가파른 산길로 300m를 올라가야 한다.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S자형으로 올라가야 하는 데, 산에 오르면 아래로 아리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참 오르다보면 쌍사자석등 좌우에 있는 계단이 나온다. 쌍사자석등은 일본 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화강석에 위에서 아래로 써내려간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라는 예서체의 반듯한 글씨를 볼 수 있다. 석비 뒷면에 이삼평을 ‘대은인’이라고 적고 있어 아리타 사람들이 얼마나 이삼평을 존경하였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듬해인 1917년부터 도조제(陶祖祭)와 함께 도자기 축제를 열고 있다.

또 하나의 추모비로 한·일 양국의 새로운 우호 친선을 바라는 아리타 주민의 모금에 의해서 제작된 도조 이삼평공 헌장비가 있는데, 1990년 10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건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아리타 지역에서는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1616년 이전에도 도기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이삼평의 백자 창시로 표면이 거친 도기가 고밀도 감촉의 매끈한 자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 도자기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은 점차 일본을 찾은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져 유럽에까지 수출되기에 이른다.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의하여 1650~1680년에 조선 도공들이 만든 아리타 야키는 수십만 점에 이른다. 더욱이 아리타 도자기는 독일의 마이센 지역으로 들어가 유럽 최초의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를 인연으로 아리타시와 마이센시는 현재 자매 도시가 되어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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