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05 |
---|---|
한자 | 孝子李福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for the Filial Piety of Yi Bok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산7-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고순영,박범 |
성격 | 정려 |
---|---|
양식 |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고려 후기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산7-1
![]() |
관리자 |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문화재 지정일 | 2009년 2월 16일![]() |
문화재 지정일 | 2024년 5월 17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에 있는 고려 후기의 효자 이복의 정려비.
[개설]
이복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눈먼 홀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집이 가난하여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음식을 얻어 와서 생계를 이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읍내의 부잣집에서 일을 마치고 고깃국 한 그릇을 얻은 이복은 국이 식을까 가슴에 품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고개를 오르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국을 엎지르고 말았다. 이복은 서러운 마음에 그자리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었다. 후에 사람들이 그 고개를 국고개라고 불렀다.
이복이 성장하여 향리로 일할 때 수령에게 몹시 미움을 받았다. 수령의 잘못된 행적이 왕에게까지 알려졌으나 암행어사마저 매수되었다. 결국 강직한 어사가 파견되어 수령은 파직되었고, 이복의 그러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효자비가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복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공주목 인물조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고려의 아전이자 효자였다는 내용만 실려 있다. 이후에 작성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호서읍지』, 『공산지(公山誌)』, 『금고실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위치]
공주시 중동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약 1.08㎞ 정도 가면 도로 오른쪽으로 옥룡동주민센터가 있다. 그 뒤편 언덕에 효자 이복비가 있다.
[변천]
효자 이복비는 원래 옥룡동 비선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 이복의 효를 알리기 위해 발기인 이치하와 옥룡동 노인회가 현재의 위치에 새로 건립하였다. 비각은 1979년에 지었다.
[형태]
효자 이복비의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비각 안에 구비와 신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구 비석[27×162㎝]은 화강암 재질로 석주 형태를 띠고 있으며, 앞면에는 효자 이복이 살았던 마을임을 나타내는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1978년에 옥룡동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건립한 신 행적비[54×173×23㎝]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현황]
효자 이복비는 사면에 철창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에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려는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는데, 효자 이복비는 고려시대의 효자 표창 사례라 주목이 된다. 공주 지역에는 효자 이복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복이 들고 가던 국그릇을 엎었다는 자리는 지금도 ‘국고개’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