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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010
한자 錦江鐵橋爆破事件
영어의미역 Bombing of Geumgang Iron Brid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군사작전
발생(시작)연도/일시 1950년 7월 1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 7월 13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금강철교[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3]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윌리엄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미 8군 제24사단

[정의]

1950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미 8군 제24사단이 금강철교를 폭파한 사건.

[역사적 배경]

금강철교(일명 금강교)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준공되었으며,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자 6월 27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중앙 정부를 대전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중앙 정부가 대전으로 이전하자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의 피난민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미국은 6·25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주일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Walker)에게 제24사단의 파병을 명령하였다. 월튼 워커 중장은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암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에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대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전 지역의 사수를 명령받은 딘 소장은 7월 8일 미군이 천안 전투에서 패배하자, 예하 모든 병력을 금강 방어선에 집중시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금강은 한강 이남에서 방어에 가장 유리한 천연적인 장애물이었으며,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낙동강까지 마땅한 방어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제24사단 예하의 제19연대는 대평리(大坪里)에, 제34연대는 공주 정면에 배치하고, 제21연대는 대전비행장에 집결시켜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아울러 딘 소장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 대전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7월 12일까지 금강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과]

미 8군 제24사단은 금강을 건너 철수한 후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치하였다. 7월 12일 공주에서 서쪽 10㎞되는 곳까지 강 하류에 있는 나루터를 수색하여 나룻배를 모두 파괴하고, 그날 밤 9시에 금강철교 경간 일부를 폭파시켰다. 7월 13일 새벽 4시에 공병 중대가 전날 반파한 금강철교를 재 폭파시켰다.

[결과]

7월 14일 북한군은 공주 서쪽의 검상리(檢詳里) 나루터에서 작은 배로 도하를 시작하였다. 미군이 북한군을 발견하고 도하를 막고자 했으나 북한 전투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다. 북한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금강 남안 아래로 도하하였다. 도하한 북한군은 우회하여 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으며, 역습을 당한 미군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같은 날 북한군이 공주를 점령하였으며, 미군은 대전으로 철수하였다. 대평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19연대도 대평리로 도하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대전으로 후퇴했고 결국, 금강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금강철교를 폭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신속한 기동력 때문에 미8군 제24사단은 금강 방어선을 구축한지 4일만인 7월 16일 밤 대전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모든 전선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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