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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격문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002
한자 反帝檄文事件
영어의미역 Anti-imperialism Manifesoto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운동|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32년 2월 28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32년 3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관련인물/단체 김순태(金淳泰)|노수남(盧壽南)|유석준(兪錫濬)|윤귀영(尹貴榮)|안병두(安秉斗)|공주고등학교|공주청년회|공주소년동맹

[정의]

1932년 2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김순태, 노수남 등이 반제국주의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살포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9년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위기에 처하고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의 생활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제는 공황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고 조선의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반적으로 학생 운동이 침체되는 가운데 공주 지역에서도 1929년 공주고보 동맹휴교사건 이후 학생 운동이 침체되어 있었다.

김순태(金淳泰)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일명 공주고보) 3학년 재학 중에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없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김순태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 학생들의 문제임을 깨닫고서 이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년 학생들의 반제국주의 사상과 민족의식 및 계급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반제국주의 사상과 대중 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의 살포를 결심하게 된다.

[경과]

1932년 2월 28일 김순태와 노수남(盧壽南)공주고등학교 동창생 유석준(兪錫濬)의 집에서 논산학우회 소유의 등사판을 빌려 「죽음의 승리」라는 제목의 격문을 제작하였다. 격문은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2,300만 대중을 구하고 부패한 조선을 구할 노동자를 위한 대중운동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3월 2일 김순태는 인쇄한 격문을 공주 소재의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기숙사 입구에 살포하였다.

김순태는 격문을 살포한 3월 2일에 다시 다른 내용의 격문을 제작하였다. 격문은 “이번 봄 졸업생 제군은 이때를 이용하여 조선 독립에 진력하라. 형무소는 자유와 승리를 얻은 자들의 수문으로 천만인이 모두 형무소에 가면 세계는 훌륭하다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3월 4일 김순태는 인쇄한 격문을 공주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 식당에 있는 흑판에 붙여 놓았다.

[결과]

공주 지역의 각 학교에 격문이 살포되자, 3월 4일 일본 경찰이 공주청년회관, 영명여학교와 영명남학교의 기숙사, 공주의 사회운동단체 간부들의 집을 수색하였다. 공주청년회 집행위원장 윤귀영(尹貴榮), 공주소년동맹 위원장 안병두(安秉斗) 등 공주 지역의 사회 운동 단체의 간부와 학생을 포함하여 1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일본 경찰의 조사 끝에 김순태와 노수남이 주도한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1932년 4월에 김순태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노수남은 금고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유석준은 김순태에게 등사판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많은 지식인 청년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반제격문사건 역시 일제강점기에 빈번히 발생했던 사회주의 운동의 하나로서,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학생들에게 식민지 지배 현실과 제국주의의 모순을 교육하여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려고 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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