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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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文擧 |
영어음역 | Yun Mungeo |
영어의미역 | Yun Mungeo |
이칭/별칭 | 여망(汝望),석호(石湖),충경(忠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박범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학자,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선교랑 이전(李瑑)의 딸 평창이씨는 1607년(선조 40)에 윤문거에게 시집왔다. 자식은 아들 셋에 딸 다섯을 두었다. 아들은 송시열(宋時烈)의 사위가 된 장남 윤박(尹搏)과 요절한 차남 윤원(尹援), 목천현감을 지낸 삼남 윤륜(尹掄)이 있다. 장녀는 별좌 이순악(李舜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현감 최세경(崔世慶)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별좌 이옹(李顒)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사인 심해(沈楷)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유명흥(兪命興)에게 시집갔다.
[활동사항]
윤문거는 1606년(선조 39)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온화하였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급제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주서·시강원설서·예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제천현감·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사간원정언을 역임하면서 척화론을 올렸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난이 끝난 뒤 정언, 수찬, 교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39년(인조 17)과 1648년(인조 26)에는 각각 부친상과 모친상으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상복을 벗은 뒤 각각 제천과 동래 두 고을의 수령으로 나름의 뜻을 가지고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효종과 현종이 동부승지·호조참의·경주목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 등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72년(현종 13) 10월 28일에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석호유고(石湖遺稿)』3권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경(忠敬).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현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현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현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옛 이름]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