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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62
한자 鄭天卿
영어음역 Jeong Cheongyeong
영어의미역 Jeong Cheong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수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진주(晉州)
대표관직 정산현감

[정의]

조선 중기 공주에서 활동한 유학자.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국좌(國佐), 호는 무동(茂東)이다.

[활동사항]

공주 지역의 대과 및 소과 급제자 현황을 살펴보면, 정천경(鄭天卿)[1547~?]은 1585년(선조 15) 진사 시험에 응하였는데 등위가 3등 94위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공산지(公山誌)』 등 여러 읍지의 인물-충신조에 이름이 나오며, 요당면(要堂面)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정천경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명나라 장수 남방위(藍芳威), 임제(林濟)와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후 정천경은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지내면서 계룡산 초혼각에 참례하여 「초혼각기(招魂閣記)」를 지었다고 한다. 1600년(선조 33) 사망하였는데, 2년 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1604년(선조 37) 원종공신(錄原從勳)에 녹훈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명나라 장수 남방위와 임제는 제독 이여송과 함께 전쟁 당시 공주에 실제로 주둔한 바가 있다. 공산성에 남아 있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중 1599년(선조 32)에 만들어진 망일사은비(忘日謝恩碑)와 위관임제비(衛官林濟碑)에 정천경과 그의 동생 정원경의 이름이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하면 1591년(선조 24) 사간원에서 “후릉참봉 정천경은 계차를 무시하고 승진하기 위하여 출사를 계산할 적에 간교하고 참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파직시키소서”라는 기록이 있다. 1596년(선조 29)에는 “일을 잘한다는 명성을 얻어 백 리나 되는 고을의 원이 되었으나 역란(逆亂)을 만나자 고을을 버리고 도주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같은 해 충청도순안어사(忠淸道巡按御史) 이시발(李時發)이 보낸 서장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정산현감 정천경의 첩정(牒呈)에 ‘이달 7일 승려와 일반인 및 군사 등 무려 1,000여 명이 홍산 땅 쌍방축(雙防築)에 모여 둔치하고서 바로 홍산 고을로 가서 현감을 끌어내어 군법을 시행하고 인신(印信)을 가져와 바치도록 했으며 무기를 수색해 냈다. 심지어는 호각을 불며 기독(旗纛)을 내어 들고서 임천까지 행군하였으며, 또한 쳐들어가 군수를 끌어내 목을 묶고는 조목(條目)을 받들게 하여 적들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라고 했습니다. 보고 듣기에 지극히 놀라운 일이므로, 사실이고 아니고 간에 첩보한 것에 따라 치계하는 한편, 가까운 고을의 포수와 살수들을 조발하여 체포할 계획 중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기록은 정천경의 활동 사항을 보여 주는데, 선조 재위 기간 국정 운영에 상당히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1829년에 건립된 요당서사(蓼塘書社)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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