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725
한자 文克謙
영어음역 Mun Guekgyeom
영어의미역 Mun Guekgyeom
이칭/별칭 덕병(德柄),충숙(忠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백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성별
생년 1122년연표보기
몰년 1189년연표보기
본관 남평(南平)
대표관직 권판상서이부사

[정의]

고려 중기 송악(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덕병(德柄)이다. 아버지는 지문하성사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문공유(文公裕)이다.

[활동사항]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간 뒤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관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내시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궁녀들과 추문을 일으키며,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등 문란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이 대노하여 상소를 불사르고 처벌하려 하였으나 언관을 내침은 불가하다는 주위의 건의에 따라 황주판관으로 강직되었고, 이어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를 거듭 외직으로 내치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있어 내직인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다른 문신들과 함께 붙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평소 문극겸의 충직함을 알아본 무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오히려 재상으로 중용되고 상장군을 겸하였다.

태부소경(太府小卿)이 되었을 때 왕이 근신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베풀자 문극겸은 “이것이 바로 먼저 왕이 폐위된 원인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습니까?”라며 직언하였다. 한편 지난 번 무신 난 때 쫓겨난 의종이 남쪽으로 떠나면서 한탄하기를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 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좌천되어 낙향할 때 지은 시 한 수가 전한다. 쓸쓸히 남쪽으로 내려가던(아마도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을 때로 추정된다) 문극겸은 충청도 유구역(維鳩驛) 객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 한 수를 벽에 써 놓았는데 “주운이 난간 분지름은 명예 구함이 아니었고, 원앙이 수레 막아섬은 어찌 자신을 위해서랴. 한 조각 붉은 정성 임금이 몰라주니, 여윈 말 채찍질하며 머뭇머뭇 물러가네(朱雲析檻非干譽 遠盎當車豈爲身 一片丹誠天未照 强鞭嬴馬退逡巡)”라는 시가 그것이다.

이후로 이곳을 지나는 조사(朝士)와 묵객(墨客)들이 이 시에서 차운(次韻)하여 여러 수의 시를 지었으며, 역사(驛舍)를 수리한 화공은 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를 그렸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입구 금계산에 있으며, 묘소 왼쪽에 세운 사당 고간원지(叩諫院址)와 함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고간원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세상을 떠나자 왕이 3일간 조회를 멈추었으며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최근에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의 비문을 새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문영기님께서 남기신 댓글에 대하여 답변 드립니다. 문극겸의 장남과 차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셨으나 위의 내용 중에는 유필과 후식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글과 혼동하신 게 아닌가 싶으니 확인 후 다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댓글에 전화번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정책 및 운영 지침에 따라 해당 댓글을 삭제하였습니다. 2018.11.02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