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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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貴 |
영어음역 | Yi Gwi |
영어의미역 | Yi Gwi |
이칭/별칭 | 옥여(玉汝),묵재(默齋),충정(忠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박범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기(李夔)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부인 인동장씨는 장민(張旻)의 딸로, 장민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일등공신에 오른 장만(張晩)[1566~1629], 인조반정의 이등공신 장돈(張暾)과 사촌이다. 그의 두 아들 이시백과 이시방 역시 반정에 참여하여 부자가 함께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26세에 생원이 되었고, 1592년(선조 25) 강릉참봉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추천으로 경기·황해·강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양 수복을 도왔다. 유성룡은 이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성현감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만족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면서 이귀의 전공을 인정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1603년(선조 36) 문과 급제 이후로는 형조좌랑, 안산군수, 배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대북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귀는 대북의 핵심 정인홍과 대립했기 때문에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1616년(광해군 8)에 이천으로 유배되었는데 3년 후에 풀려나 1622년(광해군 14) 평산부사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이 계속되자 이를 개탄하고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다. 호위대장,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우참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귀는 역모 사건에 연루된 인성군의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인조의 부친 정원군을 추숭 문제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등 왕조 안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대외정책에서 현실론적인 입장을 취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고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1633년(인조 11) 이귀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녹봉을 3년간 그대로 지급하는 등 최고의 예우를 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묵재일기(默齋日記)』·『이충정공장소(李忠定公章疏)』, 편저에 『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있다. 묘소 앞에 1641년(인조 19)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이식(李植)이 비문을 지었다. 만수리 입구에는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 앞면에는 영의정에 추증된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임을 나타내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조익(趙翼)이 비문을 짓고 오준(吳竣)이 본문 글씨를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서 글씨를 썼다.
신도비의 건립 연대는 경인(庚寅)이라고만 적혀 있다. 그러나 이귀와 비문을 자의 생몰연대로 볼 때 1650년(효종 1)으로 추정된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이귀와 그의 세 아들인 연양부원군 이시백(李時白), 사우당 이시담(李時聃), 연성군 이시방(李時昉)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성봉서사 터가 있다. 성봉서사는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