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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588
한자 尹拯墓所
영어의미역 Tomb of Yun Jeu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6월 5일연표보기 - 윤증묘소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윤증묘소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8호에서 공주시 기념물로 변경
성격
건립시기/일시 1765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윤증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학자 윤증의 묘.

[개설]

명재 윤증은 성혼(成渾)의 외증손이자 윤선거(尹宣擧)의 아들로, 17세기 조선조의 격동기를 살다 간 성리학자, 예학자이다. 호서 산림을 대표한 부친과 함께 김집(金集)을 사사(師事)하고, 윤선거의 친구인 유계(俞棨)와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권시(權諰)의 사위가 되었다. 윤증은 주자학적 종본주의를 고수하고, 학문의 자유로운 토론을 억압하며, 시대 변천에 역행하여 당면 과제를 외면하는 당시의 노론 정객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윤증의 사상은 소론 진보 세력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 일당 전제 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윤증은 뛰어난 학풍과 고결한 인품을 가져, 숙종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정승 벼슬을 내렸으며, 1714년(숙종 40)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윤 판부사는 산림에서 덕을 길러 일찍이 중망이 있었으니, 과인이 존숭하여 신임함과 사림이 존경하고 본받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하략)”와 같은 하교를 내리며 애도하고 전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위치]

천안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는 국도23호선을 따라 공주시 계룡면을 지나서 유평리에 들어설 때 우회전 후 혹신길을 따라 들어가면 향지리1구회관이 나온다. 우회전하여 조금 들어가면 윤증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모시는 영모당이 나온다. 영모당 좌측으로 가면 묘소 입구가 나온다. 약 150m 거리를 들어가면 윤증묘소가 있다.

[변천]

윤증이 죽고 9년이 지난 1723년(경종 3) 정월에 승지가 파견되어 치제(致祭)를 올렸다. 그 뒤 윤증에게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사후 32년인 1746년(영조 22) 윤3월에 니산(尼山) 두사촌(杜寺村)에 이장하였다가 1765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형태]

문인석, 무인석은 물론 석주나 석등도 없으며, 오직 비석 하나만 있다.

[금석문]

비석에 ‘유명조선국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明朝鮮國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라고 적혀 있다.

[현황]

본래 묘소에서 세일사(歲一祀)를 지냈으나 제수 준비와 제물 운반에 필요한 인력의 부족 등을 이유로 15년 전부터 계룡면 향지리 파평윤씨 노종파 문성공 종중 재실에서 거행한다. 윤증묘소는 2010년 4월 12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에 있는 홍성의 용계서원이나 논산 노성의 노강서원, 영광의 용암서원 등 여러 곳에 제향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윤증의 업적이나 성품을 알 수 있다. 또 윤증의 묘 역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공주 지역에서 윤증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또한 계룡면은 위치적으로 논산 노성에 있는 노강서원과 가까운 곳으로 논산과 공주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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