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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가동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72
한자 孝家洞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Hyoga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윤용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236년(고종 23) 12월 5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36년(고종 23) 12월 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효가동[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관련인물/단체 박인걸|이림수|탕꾸|최우(崔瑀)[?~1249]|야별초(夜別抄)|몽고군

[정의]

1236년(고종 23) 12월 공주 효가동에서 있었던 고려의 야별초와 몽고군과의 전투.

[역사적 배경]

몽고의 고려 침입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총 6차(학자들에 따라서는 7차, 9차, 11차로 구분하기도 함)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사이 호남 지역으로까지 침략군이 남하한 경우는 1236년, 1247년, 1256년, 1257년 등 도합 4회에 이른다.

1235년(고종 22)에 시작된 몽고의 제3차 침입에서 몽고군은 탕꾸[唐古]를 총사령관으로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뉘어 침공해 왔다. 이에 맞서는 고려의 강화 정부는 가능한 한 전투력의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직접 투입하지 않으려 하였다. 대신 소규모의 야별초(夜別抄)만을 파견하여 현지 백성들과의 협조 하에 유격전을 벌여 몽고군의 전력을 분산 소모시킴으로써 강화도에 대한 압박을 최소화 하려 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1236년 8월부터 몽고의 남로군은 개경, 남경, 수원, 평택, 온양, 공주를 연결하는 충청도 서부 지역의 통로를 따라 남진하면서 소부대로 나뉘어 온양, 예산, 공주 등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인 공격을 실시하였다.

[경과]

기록상으로 공주에서 발생한 전투는 단 1건의 사례가 확인된다. 몽고의 제3차 침입이 시작된 이후, 1236년(고종 23) 12월 5일 박인걸과 이림수가 이끄는 야별초가 공주 효가동(현 소학동)에서 몽고군을 만나 벌인 전투가 그것이다. 당시의 공주 효가동은 논산을 거쳐 호남으로 연결되는 간선 도로였기 때문에 몽고의 남로군 중 일부가 이 길을 통해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 중이었다. 이를 박인걸과 이림수가 각각 100여 명의 병력으로 동서 양쪽에서 협공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몽고군은 다수의 살상자가 발생하였고 야별초도 16명이 사망하였다. 몽고의 제3차 침입은 4여 년 동안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고려의 전 국토를 전화에 휩싸이게 한 전쟁으로, 몽고의 제6차 침입과 함께 가장 큰 피해를 준 전쟁이었다.

강화도 최우 정권의 소극적인 대응 전략으로 내륙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효가동 전투는 그나마 중앙 정부에서 파견 나온 소수의 정예 부대가 승리한 전투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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