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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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來 |
이칭/별칭 | 숙관(肅觀)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이승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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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이승래 파리 장서 서명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 이승래 파리 장서 운동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 이승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파리 장서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 - 이승래 건국 포장 추서 |
출생지 | 이승래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상촌 [전촌] |
거주|이주지 | 이승래 거주지 -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상촌[전촌] |
활동지 | 이승래 활동지 - 경상남도 거창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자 |
대표 경력 | 1919년 파리 장서 서명자 |
[정의]
일제 강점기 거창군 남하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승래(李承來)[1855~1927]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숙관(肅觀)이다.
[활동 사항]
이승래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에 활동하였던 거창 지역 유생으로, 윤주하(尹胄夏)에게서 배웠다. 거창군 남하면의 윤주하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으로, 곽종석(郭鍾錫)과 동문이었다. 따라서 이승래와 곽종석은 그 학맥의 원류가 이진상의 한주학파여서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승래는 1919년 곽종석과 그 문인들이 쓴 독립 청원서[파리 장서]에 거창 지역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전국의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받은 이 청원서를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김창숙은 직접 파리로 가는 대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여 제출케 하였다. 이른바 ‘파리 장서 운동’이다. 이로 인해 청원서에 서명한 유생들이 대거 검거되어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저술 및 작품]
이승래는 윤주하 사망 후 『교우 문집(膠宇文集)』(1911)을 만들 때 유고 필사 작업에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공훈이 인정되어 1995년 이승래에게 건국 포장이 수여되었다. 파리 장서의 발상지인 거창에서는 1977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옛 침류정 자리에 ‘파리 장서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