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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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必達 |
이칭/별칭 | 사겸(士兼),팔송(八松)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611년 - 정필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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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정필달 안음 별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정필달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정필달 별시 을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정필달 전적(典籍) 및 서학 교수(西學敎授)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정필달 예조 좌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1년 - 정필달 첨지중추부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94년 - 정필달 사망 |
출생지 | 정필달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
거주|이주지 | 정필달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晉州) |
대표 관직|경력 | 예조 좌랑(禮曹佐郞) |
[정의]
조선 후기 거창 출신의 문신.
[가계]
정필달(鄭必達)[1611~1694]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겸(士兼), 호는 팔송(八松)이다. 증조할아버지 정방(鄭房)이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언명(曺彦明)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처가에 대를 이를 자손이 없자 외손 봉사를 위해 거창에 정착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헌릉 참봉(獻陵參奉) 정대하(鄭大夏)이며, 아버지는 정준(鄭浚), 어머니는 박온(朴溫)의 딸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다. 부인은 처사(處士) 한정간(韓廷幹)의 딸 보안한씨(保安韓氏)이다.
[활동 사항]
정필달은 1611년(광해 3)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8세 때 합천에서 문경진(文景震)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3세 때는 아버지를 따라 진주로 와서 박민(朴敏)에게 배웠다. 정필달은 16세 때 조정립(曺挺立)에게도 글을 배웠다. 1628년에 안음 별시(安陰別試)에 급제하였다.
29세 때에는 정온(鄭蘊)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학문을 익혔다. 정온은 정필달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문위(文緯)에게도 학문을 전수받았다. 34세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했다. 사재감 참봉, 봉상시 직장 등의 벼슬을 거쳐, 1650년 전적(典籍) 및 서학 교수(西學敎授)에 임명되었다. 전적 겸 사학 교수,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다 1657년 예조 좌랑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팔송정(八松亭)을 창건하여 제자들을 모으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정필달을 ‘팔송 선생’이라고 불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정필달을 조정에서 다시 부르자 정필달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형조 정랑, 예조 정랑, 봉상시 첨정, 단양 군수 등의 벼슬을 지내고 물러나 양양에 있는 금곡이라는 곳이 산수가 수려해 말년을 보내기 적합하다고 생각해 집을 짓고 기거했다. 숙종 대에 다시 직강, 봉상시 부정, 사예 등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1691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필달은 벼슬에 나가기보다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폐단을 고칠 것을 주장했다. 당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글을 보고 임금이 정필달의 직언을 칭찬하면서 호피를 내렸다. 정필달은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83세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필달의 저서로는 『팔송집(八松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