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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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述原 |
영어공식명칭 | Lee Sulwon |
이칭/별칭 | 선숙(善叔),화촌(和村),충강공(忠剛公)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77년 - 이술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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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28년 - 이술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8년 - 이술원 양무 원종공신 책봉 |
추모 시기/일시 | 1729년 - 이술원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737년 - 이술원 포충사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38년 - 이술원 포충사 사액 |
추모 시기/일시 | 1747년 - 이술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62년 - 이술원 충강으로 증시 |
출생지 | 이술원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
묘소|단소 | 이술원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
사당|배향지 | 포충사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187 |
성격 | 의사(義士) |
성별 | 남 |
본관 | 연안(延安) |
대표 관직|경력 | 좌수(座首)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출신의 조선 후기 의사(義士).
[가계]
이술원(李述源)[1677~1728]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아버지는 증 승정원 승지(贈承政院承旨) 이연웅(李延雄), 어머니는 임여정(林汝楨)의 딸 은진 임씨(恩津林氏)이다. 할아버지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낸 이중길(李重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이여함(李汝馠)이다. 이술원의 부인은 신지성(慎之誠)의 딸 증 정부인(贈貞夫人) 거창 신씨(居昌慎氏)다.
[활동 사항]
이술원은 1677년(숙종 3) 경상도 거창현 웅양리(熊陽里) 화동촌(和同村)[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주를 갖추었으며, 효성이 깊었다고 한다.
1727년(영조 3) 전라도 변산(邊山)에서 적도들이 난을 일으키고, 기호 지방에서는 연이어 괘서(掛書)의 변괴가 일어나는 등 인심이 어수선해지자, 이술원은 곧 큰 사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였다. 이 해 박필몽(朴弼夢)이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임금을 비난하며,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그런 가운데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의 정희량(鄭希亮)이 자신의 집이 있는 경상도 순흥(順興)에서 이인좌(李麟佐)를 만나 거사를 계획하였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老論)이 서서히 집권하게 되고, 소론(少論)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소론의 과격파였던 이인좌 등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실각한 남인(南人)의 정희량 등과 결탁하였다. 즉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들이 무력으로 봉기하여 영조를 폐위시킨 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것이다. 이 거사에 참여한 정희량의 고향이 안음현이었기에 인접한 거창현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포착되고 있었다.
1728년(영조 4) 3월 1일, 이인좌가 충청도 청주(淸州)의 병영(兵營)을 급습하면서, 이인좌의 난[무신난(戊申亂)]이 발발하였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정희량이 안음현에 있는 할아버지 무덤의 이장을 구실로 민정(民丁)을 몰래 모으고, 이인좌의 동생 이웅좌(李熊佐)와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거창현에 알려지자 거창 현감(居昌 縣監) 신정모(申正模)는 문무를 겸비한 자에게 군사권을 위임하려 했다. 이때 사람들이 거창현의 좌수(座首)로 있던 이술원을 추천하였다. 군사권을 부여 받은 이술원은 안음현에 사람을 보내어, 정희량을 정탐하였다.
1728년 3월 20일 드디어 정희량이 기병하여 안음현을 함락시켰다. 이어 3월 22일에는 항복을 요구하는 격문을 거창 현감에게 보냈다. 이에 이술원은 거창 현감에게 정희량을 토벌하기 위한 군졸 모집을 건의하였고, 이를 알리는 방을 관문에다 붙였다. 그러나 격문에 겁을 먹은 아전(衙前)과 군교(軍校)들이 방을 떼어 버렸다.
3월 23일 새벽, 거창 현감 신정모는 노모와 아내를 데리고 담을 넘어 고을 북쪽의 고대(古大)[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로 도주하였다. 이술원이 20여 리나 쫓아가서 도주하는 신정모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거창 현감이 도주한 사실을 안 정희량은 곧바로 거창현을 공격하였고, 이술원은 갑작스레 적들과 맞닥뜨렸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술원은 맨손으로 적들을 물리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적들에게 나포되고 말았다. 정희량은 이술원이 문무를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이술원은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정희량을 꾸짖었다. 결국 이술원은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술원이 죽임을 당한 후, 아전 신석현(愼錫顯)·신극종(愼克終)·박세기(朴世起) 등이 몰래 시신을 객사 밖으로 내보냈는데, 홀연히 자줏빛 번개가 이술원의 시신을 둘러싸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3월 28일 이술원의 아들 이우방(李遇芳)과 집안 사람들이 복수를 위해 진주 영장(晉州營將) 이석복(李碩復)의 부대에 종군하였다. 4월 3일 정희량 부대가 이우방이 참여한 관군에 의해 성초역(省草驛)[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서 토벌되었다. 체포된 정희량은 이우방에 의해 목이 베였다.
이술원의 행적을 엮은 4권 2책의 『화촌 선생 실기(和村先生實紀)』가 전한다.
[묘소]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화동촌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28년 4월 28일 어사(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왕명을 받고 이술원을 치제(致祭)하였다. 같은 해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1729년(영조 5)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通訓大夫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으로 증직되었다. 1862년(철종 13)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737년(영조 13) 경상도 거창현 사림들의 건의로 이술원을 단독으로 배향하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 사당은 1738년(영조 14) 포충사(褒忠祠)로 사액되었으며,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