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96 |
---|---|
한자 | 星州 都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어윤동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09년 - 성주 도씨 거창 입향조 도욱 출생 |
---|---|
입향 시기/일시 | 1640년 전후 - 성주 도씨 거창 입향 추정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59년 7월 13일 - 성주 도씨 거창 입향조 도욱 사망 |
입향지 | 성주 도씨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
세거|집성지 | 성주 도씨 세거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
묘소|세장지 | 성주 도씨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내탄동 안산 홍동곡(洪洞谷) |
성씨 시조 | 도순(都順) |
입향 시조 | 도욱(都頊) |
[정의]
도순(都順)을 시조로 하고 도욱(都頊)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한(漢) 무제 때 도계(都稽)가 비조(鼻祖)이기에 중국 왕조에서 귀화한 성씨인 셈이다. 고구려의 도조(都祖), 백제의 도미(都彌), 신라 김유신을 도운 도유(都儒),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운 도진(都陳) 등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가계와 계대(繼代)[대를 이어감]가 전해지지 않으며,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 이후는 가계와 계대가 확실하여 기세조(起世祖)[1세조]로 삼아 받든다. 저작(著作)을 역임한 13세 양성헌(養性軒) 도희령(都希齡)의 증손자 도욱(都頊)이 거창[당시는 삼가현] 신원 구사리에 입향하여 학문과 덕행에 모범을 보이고, 부호로 인심을 얻어 명문가로 칭송을 받았다.
[연원]
도씨(都氏)의 연원은 한 무제 때 도계가 여가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도씨 성을 하사받아 비롯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으며, 고구려 유리왕을 도운 도조, 백제 개로왕 때 정승을 지낸 도미와 그 부인의 정절이 유명하나 대가 이어지지 않았고,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운 도진이 정승에 올라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성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이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계대를 정확히 알 수 없고,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부터는 계대가 확실하여 1세로 받든다. 대구 백파(伯派)와 성주 계파(季派)로 크게 나뉘는데, 대구 백파는 24개 종파가 있고 성주 계파는 8개 종파가 있다. 구사리 검교공파는 성주 계파에 속한다.
입향조 도욱은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에서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로 입향하였다. 도욱은 일곱 살 때 시를 읊어 신동이라 명성이 자자했는데, 당시 신원 구사의 호족이었던 주부 신원(慎謜)이 무남독녀를 두고 일류 사위를 구하는 데 낙점(落點)이 되어 구사로 오게 되었다. 입향 이래로 재력도 넉넉하고 학문과 덕행도 겸비해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다.
도욱의 입향 이래 거창의 도씨 가문은 7대에 걸쳐 천석 부호였다. 18세 도원세(都元世)는 1728년 무신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고, 도권세(都權世)는 지리에 밝고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19세 도상학(都尙學)은 기문둔갑(奇門遁甲)과 주역에 유능한 이인(異人)이었다고 한다. 21세 도계원(都啓元)은 명필이었고, 25세 도진기(都鎭基)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승만, 이상재와 사귀었다.
옛날 삼가현의 명족(名族)을 평가할 때에 1. 장단(長端)[은진 임씨], 2. 노파(蘆坡)[벽진 이씨], 3. 구평(龜坪)[파평 윤씨], 4. 구사(九士)[성주 도씨] 5. 양지(陽地)[거창 신씨]라고 할 정도로 인정받는 가문이었다.
[입향 경위]
입향조 도욱은 16세 때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창안(蒼安) 마을에서 처향(妻鄕)인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로 입향했다. 당시는 신원면이 삼가현(三嘉縣) 소속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이 되었다.
도욱은 검교공파조(檢校公派祖)인 5세 도자해(都子諧)의 11세손이고, 현조(顯祖)인 13세 저작공(著作公) 도희령(都希齡)의 증손자이며, 감정공(監正公) 도성흠(都聖欽)의 3남으로 처가가 있는 신원면 구사리로 이거하였다.
[현황]
도씨는 본관이 하나이며 국내의 성씨 순위는 63위이다. 거창군 내에 4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대표적인 집성촌인 구사리에 10여 가구가 잔류하고 있으나 출향한 일족이 400여 명이나 된다. 구사리는 원래 거창 신씨 집성촌이었으나 이후 도씨 집성촌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집성촌의 밀도가 많이 희석되었다.
문집을 남긴 이는 우천처사(尤川處士)인 도재균[都宰均, 1863~1942]의 우천집(尤川集)이 거창 문화원의 선현문집 국역사업 제4집으로 국역본이 나왔다.
[관련 유적]
o 소진정(溯眞亭): 구사 마을 남서쪽 산등성이 끝에 있으며, 13세 도희령(都希齡)을 기려 24세 도재균(都宰均)이 지었다.
o 임청정(臨淸亭): 소진정 바로 아래에 있으며, 24세 도재균이 지었다.
o 구은정(龜隱亭): 구사 마을 북쪽 끝에 있으며, 성주 도씨 구은(龜隱) 도영원(都永元)이 1828년에 지었다.
o 율계정(栗溪亭): 신기 마을 북쪽 냇가에 있으며, 24세 도봉균(都奉均)의 서당이었다.
o 지지당 성주 도공 휘 한동지비(知止堂星州都公諱漢東之碑): 필법이 뛰어났던 도한동(都漢東)의 유덕을 기려 세웠다.
o 성주 도공 묵암 휘 성락지공덕비(星州都公默庵諱成洛之功德碑): 면장을 역임한 도성락(都成洛)의 공덕을 기려 면사무소 경내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