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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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善山 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익현 |
입향 시기/일시 | 1443년 - 선산 김씨 정조공파 거창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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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선산 - 경상북도 선산군 |
입향지 | 선산 김씨 정조공파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학리 |
입향지 | 선산 김씨 취수공파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대초리 |
입향지 | 선산 김씨 강호공파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 |
세거|집성지 | 선산 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학리 |
세거|집성지 | 선산 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모곡리 |
세거|집성지 | 선산 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대초리 |
세거|집성지 | 선산 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 |
성씨 시조 | 김선궁(金宣弓) |
입향 시조 | 김의남(金義南)|김수양(金粹讓)|김연(金縯) |
[정의]
김선궁을 시조로 하고 김의남, 김수양, 김연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선산 김씨(善山金氏) 김숙자(金叔滋)와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김수양(金粹讓)의 후손인 김천일(金千鎰)은 1652년(효종 3)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동계 정온의 문인으로 인·의·지(仁義智) 3덕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연원]
선산 김씨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김알지(金閼智)의 30세손이며,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이다.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일선군에 적을 두어 일선 김씨(一善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일선(一善)이 조선 태종 때 선산(善山)으로 이름이 바뀜에 따라 본관도 선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후 선산 김씨는 김봉문(金奉文) 후손에서 5개 파, 김봉술(金奉術) 후손에서 13개 파로 나뉘어졌다.
[입향 경위]
조선 세종 때에 정조공파(正朝公派)의 후손 김의남(金義南)은 아우 김제남(金弟南)이 거창 현감으로 부임하자 거창으로 옮겨와 살았다. 거창읍 의동, 사동, 학동, 모곡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보령 현감인 취수공(醉睡公) 김수양이 가조면 대초리로 옮겨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취수공파를 이루었다. 강호(江湖) 김숙자의 손자인 김연(金縯)이 무오사화를 피해 외가 동네인 남상면 대산리로 옮겨와 살면서 강호공파 후손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현황]
1934년 조사된 조선 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거창의 선산 김씨는 남상면 대산리에 50가구, 가조면 대초리에 54가구가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 2003년 조사에서는 거창군에 461가구 1,162명의 선산 김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관련 유적]
거창 지역 선산 김씨와 관련된 유적은 남상면 괘리에 일원정(一源亭)[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78호]이 있고, 남상면 대산리 한산 마을에는 강호공 김숙자를 모시는 사당인 추원당(追遠堂)[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6호]이 있다. 가조면 대초 마을에는 취수공 김수양을 기리는 취수정(醉睡亭)이 있다. 거창읍 모곡 마을에는 거창 현감을 지낸 김제남을 기리는 모선제(慕先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