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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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斗錫 |
영어공식명칭 | Chae Du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1월 7일 - 채두석 국채보상운동 전국대표자회의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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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국채보상운동 전국대표자회의 대구군 대표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채두석(蔡斗錫)은 유학(幼學)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되었다. 이후 서상돈 등은 대구국채담보회를 조직하고 1907년 2월 24일 서문시장 장날에 국채 의연금 모금 대회를 개최하였다. 의연금 모집 사항은 1907년 3월 1일 『대한매일신보』과 『황성신문』에 보도되었다. 또한, 1907년 3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 대구국채담보회에 제1회로 의연금을 낸 134명의 명단을 실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의연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이때 채두석은 3원을 의연하였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채두석은 서상돈·이종면(李宗勉)·최영환(崔永煥) 등과 함께 1909년 10월 15일 자 『황성신문』과 10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게재하였다. 채두석은 11월 7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표자회의에 서상돈·서병규(徐炳奎)·정해진(鄭海鎭)·이일우(李一雨) 등과 함께 대구군 대표로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