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49 |
---|---|
한자 | 朴炳兌 |
영어공식명칭 | Park Byeongt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박병태(朴炳兌)[?~?]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되었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서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3월 9일에는 대구국채담보회가 조직되어 제1회 의연금 납부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박병태는 이때 5원을 의연하였다.
박병태는 이후 정재학(鄭在學)이 설립한 대구은행(大邱銀行)에서 1925년부터 서기하(徐基夏)와 함께 감사를 역임하였으며, 1931년에는 이병학(李柄學)이 설립한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의 감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