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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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人物說話-鐵原-弓裔-認識 |
영어공식명칭 | Awareness of Gungye of the People in Cheorwon from the Story of a Pers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현대/현대 |
집필자 | 유명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901년 - 태봉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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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905년 - 태봉의 도읍을 철원으로 천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918년 - 태봉의 멸망 |
철원군 - 강원도 철원군 | |
인물 설화로 살펴본 철원 사람들의 궁예에 대한 인식 |
[정의]
강원도 철원군에 전하여 내려오는 궁예에 대한 인물 설화를 통해 살펴본 철원 지역 사람들의 역사적 인식.
[개설]
태봉(泰封)[후고구려(後高句麗)]을 세운 궁예(弓裔)[?~918]는 신라 진골(眞骨) 귀족 출신으로 짐작된다. 궁예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철원과 송악(松岳)[지금의 개성]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궁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대개 포악하고 학정(虐政)을 일삼은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전설은 정치에 대하여서도, 죽음에 대하여서도 신이성을 강조하고 있어 차이점을 보인다.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 속에서 철원 지역 사람들이 궁예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궁예에 대한 기록]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태봉을 세운 인물이다. 출신에 대하여 다양한 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신라 왕의 서자였다는 설도 있다. 역사서에도 출신에 대한 설이 분분하고 그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역사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경쟁자였던 왕건(王建)[877~943]의 가계가 신화화된 것과 대조적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하여 기록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등은 모두 후대에 쓰여진 것이고,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궁예보다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왕건이 궁예의 신하였다가 나라를 세운 것이므로 왕건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서라도 궁예에 대한 평가가 정당하게 내려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역사서를 쓴 사관들은 이러한 점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타난 궁예에 대한 부정적 인식]
다음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궁예에 대한 부분을 서사 단락으로 나눈 것이다.
① 궁예는 신라의 제47대 왕인 헌안왕(憲安王)[?~861]이나 제48대 경문왕(景文王)[?~875]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성명 미상의 빈어(嬪御)[임금의 후궁]이다.
② 출생에 신이로운 점이 있어 왕이 아이를 죽이려 하였으나, 유모가 아이를 구하다 눈을 하나 잃게 되었다.
③ 유모가 아이를 양육하다 열 살이 되어 아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하자, 아이는 세달사(世達寺)에 의탁하였고 법명은 선종(善宗)이라 불리었다.
④ 까마귀가 선종의 바리 때에 ‘임금 왕(王)’ 자가 쓰인 물건을 떨어뜨렸다.
⑤ 선종은 기훤과 양길(梁吉)을 거쳐 세력을 키웠으며, 병사들과 어려움을 함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왕건이 궁예에게 의탁하자 철원 태수(鐵圓太守)를 제수하였다.
⑥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습격하여 온 양길의 부대를 제압하였으며, 이후 송악성을 수축하였다.
⑦ 자칭 왕을 칭하고 “지난 날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부수었기 때문에 평양의 옛 도읍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 말겠다.”라고 하였다.
⑧ 일찍이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화상을 보고 칼로 내치었다.
⑨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한 뒤 비로소 관직을 설정하였으며, 철원성에 도읍하였다. 궁궐과 누대가 호사스러웠다.
⑩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자칭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였다. 외출 시에 복장이 화려하고 행렬도 호사로웠다. 직접 불경 20권을 지었고, 이를 비난한 승려 석총(釋聰)[?~911]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
⑪ 궁예의 무도함에 아내 강씨가 간언을 올리니 아내를 불륜으로 몰아 불에 달군 철퇴로 음부를 찔러 죽이고, 그 소생 아이마저 죽인다. 그 뒤 의심이 많아져서 무고한 인명을 많이 죽였다.
⑫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신기한 거울을 얻었고, 거기에 기록된 글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 중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⑬ 왕건 일당이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 하니 수많은 추종자가 따랐다.
⑭ 궁예가 민복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도망갔다가 부양(斧壤)의 백성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서술되어 있는 궁예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이후 궁예에 대한 역사서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대부분 기대어 서술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외의 다른 역사서들은 모두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하다. 『환단고기』에서만 출신과 출생에 대하여 신성성을 더 부여하고 있다. 그 신이성은 다음과 같다.
“태봉국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 사람이라 본래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서 궁씨가 되었다. 대진국(大震國)[발해]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의 천복(天福) 원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옥상에서 흰 빛이 비치고 긴 무지개 끝이 하늘에 닿은 듯 보이자, 신라의 일관이 머지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궁예를 죽이려고 하였다. 어미가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궁예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 살았으며, 고생하며 양육하였다.”
위에 기록한 것처럼 궁예의 혈통의 비범함과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다는 것 등이 다른 역사서와 달리 부각되어 있다. 또한 다른 역사서에 나타난 궁예의 횡포 등이 『환단고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궁예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설]
역사서와 달리 전하여 내려오는 전설에서는 궁예의 죽음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궁예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설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기록하였다. 1924년 10월 4일, 최남선은 경원선(京元線) 삼방역(三防驛) 근처에 있는 한 서낭당을 찾아갔다. 궁예를 서낭신으로 모시는 서낭당이었다. 당시 최남선은 그 서낭당을 안내한 사람으로부터 궁예의 최후에 대해 듣고 기록하였다.
강원도 세포군(洗浦郡) 세포읍[지금의 북한 지역]에 있는 삼방산(三房山) 삼봉까지 홀로 쫓겨 온 궁예는 한 중을 만나 후일을 도모할 방도에 대하여서 묻는다. 중이 어리석다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궁예는 왕건의 뻔뻔함과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심하고 분노하여 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산 아래 물을 향하여 몸을 던진다. 그러나 궁예는 물에 빠지지 않고 산기슭에 떨어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우뚝 선 채로 죽은 궁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누이려 하여도 시신이 꿈쩍하지 않았기에 금으로 관을 만들어 시신 위에 씌운 후 위에 큰 돌을 놓았다. 그러자니 꽤 높은 돌탑이 세워졌다. 그 후 도적들이 금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돌을 걷어 내다 하늘과 땅이 요동치자 도망을 가는 일이 있었다. 또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굽이 땅에 붙어 못 지나가다 말에서 내려서 걷자 겨우 말굽이 떨어졌다고도 한다. 이후로 궁예의 무덤 앞은 누구든지 말을 타고 지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북한에서 펴낸 『북강원편람』에 따르면, 궁예가 말을 타고 삼봉까지 피란하여 왔다가 왕건의 배신에 통탄하다 말 위에서 죽었다고 한다. 왕건이 옛 정을 생각하여 문상을 왔으나 시신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건은 금관을 만들어 바치고 그 자리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지역민들을 직접 만나 조사한 자료에는 궁예에 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려고 보니 금학산(金鶴山)[947m]과 고암산(高巖山)이 있었다. 금학산을 남산으로 정하면 300년 도읍을 하는데 평강 고암산을 도읍지로 하여 일찍 망하였다. 평강 고암산은 산골이어서 산 위치는 좋았지만 그 곳에 도읍을 정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이러한 말이 있었다.
② 궁예는 왕을 30년밖에 못 하고 운이 없어 망하였다. 왕의 부인을 구미호가 잡아먹고 사람 탈을 쓰고 들어앉아서 정치를 하니 망하는 게 당연하였다. 궁예 왕의 부인이 천하일색이었는데 웃는 법도 없고, 좋아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 죽이는 것만 보면 깔깔 웃었다. 사람이 아니라 여우라서 사람 죽이는 걸 보면 좋아한 것이었다. 또 궁예 왕이 시키는 대로 하니 좋아하였다.
③ 왕건은 궁예의 오호대장이다. 모든 병권을 맡은 사람이었다. 궁예가 어떤 무녀에게 물어보니, “당신은 참 오래가는데, 열여덟 먹은 여자 젖퉁이를 하루 하나씩만 베어 먹으면 된다. 그러면 아주 오래 살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여자를 둔 사람은 다 궁예를 피해 다니느라 노심초사하였다고 한다.
④ 궁예가 오래 왕 노릇할 욕심에 왕후가 있는데도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러자 왕건이 밤낮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간섭하였다. 왕 이상으로 권력을 쥐었다. 그러다 궁예의 부인과 눈이 맞아 잠을 자게 되었다.
⑤ 명성산(鳴聲山)[921.7m]은 울음산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옛적 궁예가 패장이 되어 명성산에서 크게 울었다고 한다. 1년에 한두 번 비가 오면 울음소리가 지금도 들린다고 한다.
⑥ 왜놈들이 기차를 타고 앞을 지나가려고 하니까 바퀴가 떨어지지 않아서 못 갔다고 한다. 그래서 건너가서 제사를 지내고 갔다.
위의 자료들 중 ①, ⑤, ⑥은 2002년에 조사한 내용이고, ②, ③, ④는 1988년에 조사한 내용이다. ②, ③, ④를 보면 궁예가 강씨 부인을 잔혹하게 죽인 것은 구미호가 왕비 강씨를 잡아먹고 강씨로 변신하였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열여덟 살짜리 여성의 유방을 잘라 먹은 것은 무녀가 그릇된 비법을 주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왕건과 왕비 강씨가 사통한 이야기까지 더하여지면서 궁예가 왕비 강씨에게 행한 행위가 자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힘들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궁예에 대한 철원 사람들의 인식]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 『고려사』, 『삼국유사』 등이 있으며, 최남선이 1924년에 직접 답사하여 정리한 이야기와 북한에서 출간한 『북강원편람』 등이 있다. 문헌에 나와 있는 궁예 이야기 중 궁예의 죽음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궁예의 죽음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부인 강씨와 두 왕자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과정과 방법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하다. 부인이 왕의 폭정을 말리자 관심법(觀心法)으로 보았다면서 왕비를 간통한 사람으로 몰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평강으로 도망가는 내용이 있다. 며칠 굶어서 허기가 진 궁예 왕은 보리밭의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서 돌에 맞아 죽는다. 왕이었던 궁예가 돌팔매에 맞아 죽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궁예에 대하여 본래 신라 사람인데 나라를 버린 사람이며, 어질지 못하여 신하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기술하고, 그처럼 흉악한 사람이 감히 “우리 태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랴.” 하고 논평한다.
세 책은 모두 고려 시대에 작성된 것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삼국유사』는 모두 패자의 입장에서 쓰여졌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궁예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를 할 리 만무하다. 궁예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왕건은 반역자이고 역모를 일으킨 신하일 뿐이다. 그러니 고려 시대의 사가(史家)들은 궁예가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할수록 왕건의 반란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내용을 문헌에 남긴 것이다.
이에 비하여 앞서 이야기하였던 최남선의 글과 『북강원편람』에 나온 두 이야기는 앞의 세 역사서에 나온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궁예에 대한 평가가 궁예의 죽음을 통하여 다르게 내려진다. 앞의 세 이야기는 궁예를 못나고 포악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에 걸맞은 비참한 죽음을 보여 주는 반면, 뒤의 두 이야기는 왕건의 배신을 강조하고 궁예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있다.
강원도 철원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궁예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최남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들이 민심을 대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서낭신으로 좌정시켜 매번 제사를 올리고, 왕건이 직접 찾아와 황금 관을 만들게 하고 제사를 지내게 한 인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철원에 나타난 왕을 철원 사람들은 그렇게 모시고 있는 것이다. 전설은 전승 집단의 아픈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전승되지만 집단 기억의 재생이고 되풀이되는 이야기이다. 아픈 체험에 대해, 지키지 못한 왕에 대해 전설 속에서 궁예 왕은 황금 관을 쓰고 우뚝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