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13
한자 京元線-復元-鐵原郡位相
영어공식명칭 Restoration of the Kyongwon Line and the Phase of Cheorwon County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갑열

[정의]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단절된 경원선 복원을 통한 철원의 발전 희망과 남북 평화통일 염원.

[경원선, 외부의 힘에 의하여 건설되다]

강원도 철원군은 한반도의 중앙 지대로서 철원평야가 자리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근현대사에 중요한 공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마식령 산줄기와 철령 산줄기 사이에 있는 추가령구조곡의 중간에 있어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던 지역이다. 근현대사에서 철원군 발전의 핵심 역할을 하였던 것이 경원선 부설과 금강산 전기철도 건설이다. 철원 지역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경원선 철도가 건설됨으로써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중앙수리조합 신설과 저수지 축조가 이루어졌으며,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 일대의 각종 산물이 모이는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의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경원선은 경성[서울특별시 용산역]에서 강원도 철원군과 안변군을 거쳐 원산시까지 222.7㎞를 연결하는 철도이다. 경원선은 원산시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함경선과 연결되어 한반도 동북 지방을 서울과 연결하는 철도로 산업과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통 노선이다. 경원선은 한반도를 가로질러 서울과 동해안을 연결하고, 함경선과 만나서 두만강에 이르며, 국경을 넘어서면 시베리아철도와 이어지면서 유럽까지 진출할 수 있어 국가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다.

19세기 말 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외교전은 치열하였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1월 외국인 철도 및 광산 경영은 일체 허가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1896년 9월 30일, 프랑스의 피브릴르(Fives Lile) 회사가 주한 프랑스 대사를 통하여 경원선 부설권을 청구하였으며, 1898년 8월 1일 독일 총영사 크린(Krien, F.)이 한국 외부대신에게 경원선 부설권을 그들이 세운 세창양행(世昌洋行)에 허가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이미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여 공사에 들어간 일본도 경원선 부설권이 대한정책(對韓政策)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1899년 6월 17일 대리 공사 하야시[林權助]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하게 하였지만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그러다가 1898년 7월 대한제국 정부는 국내 철도 회사를 운영하는 박기종(朴琪淙) 등에 경원선 부설 허가를 주고, 궁내부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선과 경원선의 건설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국내 철도 회사는 1899년 7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에서 경기도 의정부시를 거쳐 경기도 양주군에 이르는 약 40㎞ 구간의 선로 측량을 시작하였으나 자금 사정으로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곧 중단되었다.

이후 프랑스, 독일과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일제(日帝)는 ‘경의 철도 자금 대부 약관’에 들어 있던 ‘경원 철도 부설을 하기 위하여 기채(起債)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조항을 악용하여 1904년 경원선에 대한 출자 권리를 내세웠고, 경원 군용철도 부설권을 요구하여 강제로 승인을 받아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일본군 및 군용물자의 수송이 필요하였던 일본은 1904년 2월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편성하여 강제로 경원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경원선 부설권이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 수단으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1906년 9월 경원선 부설 업무가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4월 용산에서 선로 측량이 시작되었고, 1911년 3월 원산에서도 측량이 시작되었다. 1911년 10월 용산~의정부 간 31.2㎞가 처음 개통된 뒤 1914년 8월 14일 세포~고산(高山) 구간의 26.1㎞가 개통됨으로써 222.7㎞의 경원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원선은 험준한 지형의 추가령구조곡의 지구대를 따라 건설되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기존 도로가 미비된 상태에서 철령 산지를 넘어야 하였으며, 특히 경술국치 직후라 민간들과 의병의 저항과 습격이 잦아 공정 과정에서 어려움이 컸다.

[철원의 발전과 주민생활의 변화]

경원선 건설 후 운행 초기에는 운송 실적이 저조하였으나, 철도 연변에 금강산·석왕사(釋王寺)·원산해수욕장 등의 관광 명소가 있어, 계절에 따라 객차를 늘리거나 임시 열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1928년 9월 1일 원산과 상삼봉(上三峯)을 잇는 함경선이 개통되어 경원선과 연결되자, 3~7일씩 걸리던 서울~회령 간이 약 26시간, 서울~청진 간이 약 22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그만큼 경원선의 역할이 커졌다. 그러나 본래 군사 목적으로 건설된 철도로 연변의 산업 시설이 부재하고 인근 지역에서조차 개발이 철저히 도외시되었기 때문에 운송 실적은 대체로 저조하였다.

1931년 7월 1일 철원군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통되면서 철원군은 금강산의 관문이 되어 경원선 승객이 늘어나 인구의 유동성이 증가하였다. 적벽돌 2층 건물인 철원역은 전체 규모가 16만 5289㎡이고, 근무하는 역원도 8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37년 발행된 『철원군지』를 보면 철원역을 이용하는 승하차 연인원이 경원선의 경우 26만 3047명이고, 금강산 전기철도는 15만 3992명이었다. 수하물은 경원선이 3만 9444개, 5만 3188톤이었고, 금강산 전기철도는 1만 6420개, 1만 423톤이었다. 철원역을 시발점으로 경성까지 101㎞[16역]를 통과하는 소요 시간이 1시간 59분, 원산까지 125㎞[18역]로 소요 시간이 3시간 10분, 금강산 전기철도는 내금강역까지 116.6㎞로 소요 시간이 4시간으로 철원이 교통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경원선은 경의선 못지않게 손님이 몰려들었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동해안 지역 주민들의 이동 수단이 철도로 전환되면서 엄청난 이용 수요 폭증으로 경원선은 선로 용량에 압박을 받았다. 이에 일제는 1938년 경원선 복선화를 결정하고 복선화 작업 준비를 하는 도중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함으로써 계획이 중단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철도이고 사설(私設) 철도이다. 경원선철원역에서 갈라져 김화(金化)와 창도(昌道)를 거쳐 종착역인 내금강(內金剛)까지 116.6㎞ 거리이다. 1918년 금강산을 찾은 일본인 사업가 구메 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는 뛰어난 절경에 탄복하며 관광지 개발 가능성과 지형을 고려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터널을 통하여 동쪽으로 보내 낙차를 이용한 수력 발전으로 전기를 일으키고 이를 이용하는 전기철도 건설에 착안하였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1919년 공사를 시작하여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고, 1931년 7월 1일 내금강까지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금강산 구경을 소망하는 국민뿐 아니라 일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운행을 시작한 1924년에는 184명, 1925년에는 186명의 관광객이 이용하였다. 내금강까지 개통된 1931년에는 1만 5219명으로 늘었고 1938년에는 2만 4892명으로 급증하였다. 수학여행단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산이나 서울에서 경원선을 거쳐 내금강까지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는 연계 수송 체계도 마련됨으로써 철원은 당시에 타 지방 도시에 비하여 매우 활성화되었다.

1942년 전력 사업 통합 정책에 따라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금강산선으로 통합되고,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한 새로운 철도 건설과 간선 보강에 필요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1944년 금강산선 철도에서 창도~내금강 간 49.0㎞를 철거하고, 철원~창도 간 67.6㎞만 운행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남북분단으로 전력 공급이 단절됨에 따라 이마저 운행이 중단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금강산 관광을 위하여 건설된 것이지만 철원군 주민들에게는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철원 동부 지역과 강원도 김화군·평강군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에게는 통학 수단이었으며, 주민들에게는 관공서와 철원장에 장을 보러 가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당시에 철원 지역 초등학생들 수학여행은 대부분 금강산으로 갔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소요시간은 약 4시간이며 일반인 운임은 7원 56전으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이었다. 주로 하루 여행으로 새벽 2~3시 철원역에서 출발하여 내금강에 도착할 즈음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경원선의 단절과 철원의 아픔]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지만 남북이 분단되면서 38도선 이북이었던 철원은 공산 치하가 되면서 옛 영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철원은 수복 지구가 되었지만 격렬한 전투 속에 당시의 시가지와 철원역은 흔적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무인지대이다. 1952년 가을 휴전 회담을 앞두고 주도권 장악을 하기 위하여 전력을 증강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총 공세를 이어갔으며, 유엔군과 한국군도 전략적 요충지로서 철원을 중심으로 평강과 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 방어를 위하여 격전을 치렀다.

철의 삼각지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국도 제3호, 국도 제5호가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인 드넓은 철원평야를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김화 지역의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약 6주간 진행되었다. 국군 2사단이 저격능선을, 미 7사단이 삼각고지를 향하여 중공군 12군 및 15군 예하 4개 사단에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우리 군의 선제공격은 6·25전쟁 중에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남북 분단은 경원선의 단절을 초래하였으며, 철원은 접경지역의 변방으로 전락하면서 화려한 명성은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나가고 있는 2019년까지 두 동강이 난 철도는 녹슨 채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남북의 철원 지역은 접경지대로서 경원선이 놓여 있던 레인은 흔적과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다.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이 끊어져 있고 철교의 교각만 남아 있으며, 출입이 금지된 곳이 대부분이다. 역의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지만 역사(驛舍)가 있던 터와 주변 모습이 비교적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곳도 있다.

철원은 905년 궁예태봉국의 도읍으로서 본궐이 자리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며, 철도역이 있었던 마을은 사실상 당시 철원군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중심 역할을 하였던 마을이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태봉국 철원성 터는 군사분계선이 설정되면서 비무장지대에 놓이게 되었고, 월정역 역시 북방 비무장지대[DMZ] 안에 자리하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경원선 복원의 희망과 철원의 미래]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서 경원선 철도 복원 사업은 한반도 긴장 완화, 남북한 상호 신뢰 구축, 남북 교류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실질적 통일 준비를 위한 기반 조성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1982년 경원선 복선 전철화 사업이 시작되어 1986년 성북역-의정부역 간 13.1㎞가 완공되었다. 1997년부터 용산역-신탄리역 간 88.8㎞가 운행되고 있으며, 2002년부터 10여 년간 철원 군민 모두가 나서서 줄기차게 경원선 복원 운동을 추진하여 2012년 11월 20일 철원군 백마고지역까지 연장 개통되었다. 신탄리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5.6㎞ 연장하는 데 60년이 걸린 셈이다. 철원역까지의 연장이 아니기에 철원 군민들에게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철도 복원 사업은 기존 철도노선을 정비하여 수도권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용산-의정부 간에 여객이 가장 많고, 경기 북부 지역의 인구 증가로 인한 이용객이 증가하고 있다. 철원 군민들의 염원인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여 북측 지역 경원선까지 연결하는 복원 사업은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철원역에서 평강-세포-원산으로 이어지고 금강산 철도가 복원되면 내금강을 철도로 관광할 수 있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지난 2015년 8월 5일 총 사업비 1,508억 원 규모로 경원선 남측 구간 백마고지역에서 월정리역 9.3㎞ 구간의 단선철도 복원 공사를 착공하였으나 2016년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자 경원선 복원 공사도 기초 조사가 이루어지던 초기 단계에서 중단되어 지금까지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통일에 대한 희망은 계속되고 있다. 남북 관계의 개선과 통일에 대한 민족의 바람 속에서 경원선 복원은 철원군 지역 경제 발전과 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남북 간 여객 및 화물 수송에 기여하고 있으며, 만주횡단철도[TMR] 및 시베리아철도[TSR]와 연계되어 국제 철도교통 시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경원선의 복원 사업은 이를 위한 첫걸음이며, 그날이 오면 철원은 다시 한반도 국토의 중앙이자 정치와 경제 협력 공간으로 위상이 크게 변할 것이다.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시작된 이후 철원군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남북한 교류 협력 및 통일에 대비한 준비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향후 계획으로서 협력사업 관련 분야, 통일 문화 조성, 기술 및 정보 교류, 경원선 복원 등 계획 구상의 실현을 통하여 철원군의 위상 강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경원선 월정리역은 옛 모습 그대로 단아하게 서 있지만, 녹슨 철도와 기차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외침을 토하며 경원선 복원을 간절히 바라는 대한민국 국민의 소망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