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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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寶物-未開拓地, 鐵原-靑銅器時代遺蹟-遺物 |
영어공식명칭 | Outer Bronze Age Treasures. Bronze Age Artifacts and Sites of Cheor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박경신 |
[정의]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서 조사를 통해 보고된 청동기 시대 유적과, 조사 및 채집을 통해 확인된 유물들의 역사적 의미.
[철원군 주민이 찾아낸 청동기 시대 발자국]
강원도 철원군에서 발견된 매장문화재 신고품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편이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발견 매장문화재의 존재는 선사 시대 철원군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철원군 발견 매장문화재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졌다. 그 시초는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07~2011]였다. 아리미쓰 교이치는 1938년 강원도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물을 소개하면서 임진강 상류역 철원군에서 발견된 3점의 석기(石器) 유물을 도면과 함께 소개하였다. 이 유물들은 무장면(畝長面) 중세리(中細里)에서 출토된 대팻날돌도끼 1점과 간돌화살촉 1점과 당시 춘천중학교에 소장 중이라고 하였던 바퀴날도끼 1점이다.
광복 이후에 처음으로 매장문화재가 신고된 것은 1967년이다. 주민 엄진섭이 1967년 7월 23일 학사4리에서 간돌검 1점을 채집하여 신고한 것이다[국고귀속일 1969년 9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후 1973년 4월 27일에는 정해룡이 대마리에서 간돌도끼 1점을 채집하여 신고하였고[국고귀속일 1974년 3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75년 8월 18일에는 진길수가 동막리에서 간돌화살촉 1점을 채집하여 신고하였다[국고귀속일 1980년 9월 15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지막으로 1985년 12월 16일 이대겸이 와수5리에서 홈자귀 1점, 반달돌칼 3점을 채집하여 신고하였다[국고귀속일 1987년 2월 13일, 강원향토박물관 소장]. 이후 발견 매장문화재 신고는 이어졌지만,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은 없었다. 한편, 1977년 12월 29일 김영배가 토성리 일원에서 간돌도끼 2점, 둥근돌 1점, 간돌창 2점, 간돌화살촉 11점, 가락바퀴 1점, 석미정 2점 등 총 20점을 채집하여 강원도향토박물관에 기탁한 기록도 전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철원군 주민들이 찾아낸 청동기 시대 유물들은 대체로 농기구와 무기류가 중심이었다. 수량으로 볼 때 간돌화살촉이 13점으로 가장 많았으며 간돌도끼와 반달돌칼이 3점으로 뒤를 이었다. 그리고 간돌창과 석미정이 각각 2점이고, 간돌검, 홈자귀, 둥근돌, 가락바퀴, 대팻날돌도끼, 바퀴날도끼가 각 1점씩이었다. 이처럼 수량은 적지만 철원군에서 채집된 청동기 시대 유물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청동기 시대 유물들 구성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한편 간돌검과 간돌창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물들은 주로 마을 터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들이다. 따라서 무덤보다는 마을과 관련된 유적이 철원군 지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채집된 위치를 지도상에서 살펴보면 철원군의 중앙부 지역에 대부분의 채집 장소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모두 한탄강 상류역에 집중되어 있는 특징이 관찰되는데 와수리부터 동막리 사이 지역이 가장 밀집도가 높다. 이에 비하여 철원군 근동면,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등에서는 아직 매장문화재 발견 사례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민간인 출입 통제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청동기 시대 마을 터가 주로 하천을 면하고 있는 넓은 충적 대지상에 입지하는 점을 감안할 때 향후에도 청동기 시대 마을 터가 확인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결국 한탄강 상류에 형성된 넓은 충적 대지 주변에서 다수의 발견 매장문화재가 신고되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된다. 향후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유물들이 채집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철원군에서도 청동기 시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1점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비파형동검은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매월 또는 격월로 이루어진 각지 정기 조사 과정[제5회 사료 조사]에서 확인된 유물이다. 출토지는 철원군 철원읍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촬영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로 기록되어 있다. 비파형동검은 지역 수장층이 무덤에 껴묻거리로 사용한 유물이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의 존재는 이 지역 정치체의 세력을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이처럼 정식 발굴 조사는 아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철원군의 청동기 시대 문화상이 소개되고 있는데 고고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철원 군민의 힘이 가장 컸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계가 화들짝! 철원군에서 청동기 시대 마을 터가 드러나다]
강원도 철원 지역은 개발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개발 수요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따라서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마을 터가 발견되리라고 예상한 고고학자는 많지 않았다. 다만 한반도 북부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관문 역할을 하는 철원군 지역에 반드시 마을 터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만이 무성하였다. 물론 다수의 고인돌 유적으로 인하여 일제 강점기부터 이미 청동기 시대 문화가 일정 정도 파급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덤을 만들었던 일반 사람들의 마을 터는 전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간간이 채집 신고된 매장문화재를 통하여 이미 청동기 시대 마을 터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농업기반공사 철원지사가 신벌지구 경지정리사업을 추진하면서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3년 12월 27일부터 2004년 2월 28일까지 실시한 철원 와수리 유적 시굴 조사 과정에서 드디어 청동기 시대 대규모 마을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집자리 30동과 수혈유구 5기가 확인되었다. 물론 시굴 조사의 한계상 전체 면적을 조사하지 못하고 구덩이를 파서 현황만을 조사한 결과로 전체 면적을 모두 발굴 조사하면 집자리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철원군 지역에서는 처음 확인된 청동기 시대 집자리라는 중요성이 부각되어 시굴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1호, 2호, 4호, 29호 청동기 시대 집자리가 발굴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방형, 장방형, 세장방형으로 다양하였는데 화덕 시설로는 토광식(土壙式)과 위석식(圍石式)이 확인되었다. 특히 세장방형의 4호 집자리에서는 무려 4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 가운데 토기류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퇴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골아가리토기[口脣刻目土器] 등이 있다. 석기류는 간돌검, 대팻날돌도끼, 간돌도끼, 부리형돌도끼, 간돌화살촉, 간돌창, 반달돌칼, 가락바퀴, 원판모양석기, 갈돌, 갈판, 어망추, 옥 등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과 집자리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와수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기 이른 단계[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호 주거지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를 감안하면 연대는 더욱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결국 와수리 유적의 조사는 철원군 지역에도 청동기 시대 전기 단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었음을 방증하여 주는 자료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연구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발굴 조사 결과로 평가된다. 앞으로도 한탄강 상류역에 형성된 넓은 충적 대지를 조사한다면 더욱 많은 수의 마을 터가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철원군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의 맵시]
강원도 철원군은 지정학적으로 동북한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가 추가령구조곡을 통하여 한반도로 확산되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원산-추가령구조곡-평강-철원-연천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대 교통로상에 있어서 철원군의 존재는 더욱 중요하였다. 특히 임진강을 따라 확산되는 중부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 철원군이다. 이러한 양상은 원산-회양-금성-낭천-춘천으로 연결되는 북한강 상류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권 확산 경로와 함께 철원군 청동기 시대 문화상에 대한 해석은 중부 지역 청동기 시대 문화 해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 강원도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에 대하여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현재로서는 철원군에서 확인된 대규모 마을 터의 흔적은 북한의 청동기 시대를 읽는 시금석과 같은 존재이다.
철원군의 청동기 시대 마을 터와 무덤은 모두 한탄강 상류역의 충적 대지상에 밀집되어 있다. 그리고 발견 매장문화재 역시 이 지역에서 주로 신고된 것이다. 주로는 농경에 사용된 도구들과 토기류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일부 유물들은 무덤에 껴묻거리용으로 제작된 것이 포함되어 있어 이채롭다. 향후 한탄강 상류 지역의 충적 대지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진행된다면 동북한 청동기 시대 해석은 물론 중부 지역, 나아가 한반도 남부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은 고인돌이다. 비록 철원군 지역 고인돌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구조적으로 전형적인 탁자식(卓子式) 구조라는 점은 외형상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철원지석묘군’의 1호 고인돌 덮개돌의 길이는 무려 4.02m에 이른다. 이러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인돌의 존재는 청동기 시대 철원군 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말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마도 철원군 지역을 통치하였던 부족장 성격의 유력 수장층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는 간접 증거이다. 고인돌은 그 자체가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평지에 위치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점에서 철원군 고인돌의 수량과 규모 등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당시 사회상은 중부 지역 청동기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