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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대유(大有), 호는 남계(南溪)이다.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의 7세손이며 좌랑(佐郞) 경신직(慶臣直)의 아들이다. 학식이 고명하고 만고의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청원군 남일면 모산(茅山)에서 살았다. 조선 세조 임금 때에 조정(朝廷)에서 불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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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청주 출신이며, 양민으로서 효행이 극진하였다. 어머니가 개가를 하였는데, 모친과 이부(異父)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었다. 나이 17세에 형을 대신하여 요동(遼東)의 역(役)에 나갔다. 이때에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임금]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요양에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협상으로 요동에 있던 조선 군사를 돌려보내게 되었다. 고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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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청주 출신이다. 순조(純祖) 때의 사람으로 네 살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偏母)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늙도록 효도를 다하였다. 어머니 상 때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성묘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상을 입지 못하였던 일을 한탄하더니 그의 회갑에 이르자 한이 맺혀 상복을 갖추어 상례(喪禮)를 삼년간 다하니 정성이 대단하여 향리에 널리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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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아버지는 곽여찬(郭汝贊)이다. 청주 출신으로 부인은 인천이씨(仁川李氏)이다. 효자 곽여찬(郭汝贊)의 아들로 아버지의 효행을 이어받아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자른 피로 어머니를 구한 일이 있다. 아버지 병환을 고치려고 정성을 다하였으나 약값을 마련하지못해 도리가 없어 관가에 나가 공천(公賤)에 몸을 팔려고 하였더니, 관가에서 그 효는 가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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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효자 곽진은(郭鎭殷)의 부인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남편은 곽진은이고, 청주 출신이다. 친정에서 부모에 효를 다하였고, 출가하자 늙고 가난한 시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시부모의 병을 고치고자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다. 인천이씨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850년(철종 1)에 정려(旌閭)되었다. 인천이씨 효자각은 남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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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충신. 조선 후기 정묘호란 때 절개를 지킨(節臣) 사람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기오(箕吾)이고 청주 출신이다.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이며,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의 종제이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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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남편은 김여산(金如山)으로 청주 출신이다. 김여산의 처로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남편의 병환이 위급하자 세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을 치료하였다. 아들 아홉형제를 선도하였으므로 여러 번 쌀과 고기가 하사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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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청주 출신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지성으로 어버이를 공양하였다. 일찍이 도적이 집에 들어 칼날이 그 어머니에게 미칠 때 김연이 몸으로 막으니 도적도 감격하여 범하지 못하였다. 그 뒤 어머니가 등창이 나서 앓을 때에 밤낮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였다. 모친의 병환에 지성을 다하고자 눈 속에서 알몸으로 하늘에 빌기가 일쑤였는데 지성이 지극함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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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효자.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위경(衛卿)·등가(登可)이다. 좌의정(左議政) 김사형(金士衡)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숙(金宗淑)의 아들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출신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 녹사(錄事)가 되었다. 이후 춘천부사(春川府使)·군기감정(軍器監正)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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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충신. 조선시대 유학자이며, 문신(文臣)이다.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이다. 1486년(성종 17)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로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10세에 사서(四書)에 능통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여 정언(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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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김정오(金鼎五), 김정삼(金鼎三), 김정일(金鼎一)의 형이며, 청주 출신이다. 천성이 착하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예절과 몸가짐이 고매하였다. 모친의 병환에 강의 물고기가 먹고 싶다하므로 그 아우 김정오, 김정삼, 김정일과 더불어 그물을 가지고 개울에 나갔더니 갑자기 누치(訥魚) 한 마리가 그물로 들어 왔다. 또한 꿩 두 마리(雙雉)가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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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의병.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호(號)는 삼함당(三緘堂)이다.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출신이다. 1576년(선조 9)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의병 5백 명을 이끌고 충주(忠州), 죽산(竹山) 경계에 포진하여 관군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크게 전공(戰功)을 거두었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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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돈령(敦寧) 김복원(金復元)의 아들로 청주 출신이다. 효행이 뛰어났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삼재체용도(三才體用圖)」를 만들었으며, 암행어사김명진(金明鎭)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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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本貫)은 청풍(淸風)이며, 청주 출신이다.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남부주부(行南部主簿)이 이르렀다. 형인 김호철와 함께 형제가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석에 눕자 형제가 모두 손가락을 잘라 병을 치유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생전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예를 다하였다. 숙종(肅宗) 임금 때에 쌍효(雙孝)로 정려되었다. 뒤 사람이 그 정문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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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순조(純祖) 임금 때 사람으로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였다. 부친이 신체가 부어오르는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백약(百藥)이 듣지 않아 걱정하던 중 주변에서 잉어를 써보라 하기에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부모가 노환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홍시를 먹고 싶다고 하므로 친구 집이 있는 문경(聞慶)까지 120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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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本貫)은 청풍(淸風)이며, 청주 출신이다. 동생 호설은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남부주부(行南部主簿)이 이르렀다. 형제가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이 높았다. 부모가 병석에 눕자 형제가 모두 손가락을 자른 피로 병을 치유하였다. 그 뒤 부모상을 당하여 생전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예를 다하였다. 숙종(肅宗) 임금 때에 쌍효(雙孝)로 정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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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 찾아가 드리는 제사. 묘제는 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모두 지칭한다. 먼저 장례 기간에 올리는 묘제가 있다.. 묘의 봉분을 만든 뒤 처음으로 묘제를 올린다. 영좌를 묘 앞에 모시고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술잔을 올린다. 축문을 읽은 뒤 두 번 절을 한다. 그리고 소상과 대상 때도 묘제를 올리며, 탈상을 했을 때도 묘제를 올렸다. 청주지역에서는 지금 소상 대상이 없고 탈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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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靈柩)가 집을 떠나 묘지로 가는 절차.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루기 위해 마을 전체가 동원된다. 그러다보니 장례 뒤에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예도 많았다. 여기에 3년 상까지 하게 되면 더더욱 생활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3년에는 가정의례준칙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마을에는 장례를 치를 노동력이 부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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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설화에는 신화, 전설 민담이 있는데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것은 전설이다. 신화는 민족적이고 민담은 세계적이다. 청주지역의 전설은 구삼국시대부터 접경지여서 축성전설(오뉘힘내기 유형)이 많음이 특징이다. 그리고 전설은 한문을 좀 아는, 소위 유식한 사람들이 구연하는데, 풍수지리, 열녀, 효자, 충신, 위인들에 대한 것으로 한자어를 즐겨 사용한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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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에 속하는 법정동. 본래 청주군 북주내면(北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청주향교의 서쪽에 있어서 교서(校西)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원리(院里) 일부와 동주내면(東州內面)의 교동리(校洞里) 일부를 묶어 교서리(校西里)라 명명하고 이를 청주면에 편입하였다. 1920년 교서리를 일본식 지명인 수정(壽町)으로 바꾸고 광복 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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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또는 중매로 만난 두 남녀가 혼인을 하기로 약속하는 것. 전통 혼례에서는 약혼이란 용어는 없다. 다만 양쪽 집안에서 혼인하기로 합의하게 되는 그 자체가 약혼의 의미가 된다. 신식 혹은 현대적 결혼식에 약혼식이 있다. 약혼은 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1973년에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당사자들의 호적등본과 건강진단서를 첨부한 약혼서를 교환하되 약혼식은 따로 거행하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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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의 우암동, 내덕동, 대성동, 용담동, 명암동에 걸쳐 있는 산. 이 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상당현의 치소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신라 신문왕 9년(689)에는 우암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의 3개 봉우리를 거쳐 남서방향으로 뻗어 내린 서쪽의 능선, 그리고 정상에서 동쪽으로 분기했다가 서쪽의 능선과 거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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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아들이다. 기량이 준매(俊邁)하여 일찍이 무과에 올라 조수와 영암군수를 지냈다. 단종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연풍의 백운산에 숨어 살았다. 뒤에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으로 옮겨 살았으며 행정(杏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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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신부가 혼례복으로 초례상을 마주하여 절을 하고 술잔을 서로 나누는 것.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합근례가 신랑 집에서 행해지던 것이 1518년(중종 13) 신부 댁에서 전안교배(奠雁交拜)하고, 그 집에서 화촉을 밝히라는 임금님의 명령인 전교에 따라 친영례(親迎禮)가 행해졌다.이 친영례는 전안례와 초례로 되어 있다. 전통혼례의 초례는 이때부터 전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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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청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 도읍한 이후에 많은 사람이 주거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에서 낙향하거나, 선조의 묘지를 쓰고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충효를 강조하여, 충청지역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조선 이후에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청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은 사람은 드물고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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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대성동에 속하는 법정동. ‘탑’이 있어서 ‘탑골’ 또는 ‘탑동리’라 한 것이다. ‘탑골’은 탑동 최초의 마을이다. ‘탑골’의 ‘탑’은 ‘오층석탑’으로써 ‘탑골’의 ‘골’이 ‘동’으로 한자화한 지명이다. 본래 청주군 동주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사주면의 금천리에 병합되었다가 1935년 다시 탑동정(塔洞町)으로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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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에 있는 해월의 묘. 우암산 우회도로의 대한불교수도원의 기점에서 우회도로를 따라 약 800m 지점이며, 우암산우회도로가 있어 접근하기에 편리하다. 태극문을 새긴 대리석에 ‘烈女海月之墓(열녀해월지묘)’라는 묘비와 더불어 있다 조선 영조(英祖) 즉위 후 소론이 배격되자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는 정희량(鄭希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