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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1386년(우왕 12) 전법판서(典法判書), 동북면 안무사(東北面按撫使)를 거쳐, 1388년 밀직부사, 청주목사 겸 원사를 지냈다. 조선건국 후인 1396년(태조 5)에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가 되었다. 고려 말 우왕 때 권화가 청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고성(固城)의 이금(伊金)이라는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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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있는 김우항의 신도비. 조선 숙종 대의 문신인 김우항의 신도비이다. 1964년 10월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이종만(李種萬)이 짓고, 글씨는 변영인(卞榮寅)이 썼다. 상당구 산성동 청주에서 청원군 미원면으로 가는 국도변 왼쪽 언덕에 있다. 사각의 밭침대 위에 높이 143㎝, 폭 55㎝, 두께 25㎝의 오석(烏石) 비신을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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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에 있는 조선시대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지낸 김하련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상당구 율량동 율봉공원의 율량동 고가 입구에 있는 4기의 비석 가운데 두번째 비석이다. 비석의 반 이상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온전한 비석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으나 율봉공원으로 이전하면서 원래의 상태로 세웠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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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이후의 문신과 무신의 총칭. 고려 4대 왕 광종(光宗)[946~975]은 후주(後周) 사람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후부터 문무의 관리를 별도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5대 왕 경종(景宗) 때 부터는 문관을 동반(東班), 무관을 서반(西班)이라 하여 구별하였고, 이들 문반과 무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하였다. 양반은 곧 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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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박숭원(朴崇元)의 신도비. 조선 선조 대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인 박숭원의 신도비이다. 비문은 황경원이 짓고, 윤용구가 글씨와 비액을 썼다. 그리고 박숭원의 외손인 송의섭이 이미 선조 대에 비문을 지었으며, 순조 대에 와서 비를 건립하게 된 내력에 대한 추기를 새겼다. 흥덕구 수의동 도장골마을 입구 왼쪽 언덕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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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예술가. 초명은 인(仁)이다. 어려서 과거에 합격하여 청근(淸謹)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공경하였다. 1087년(선종 4)에 예빈소경으로 있으면서 고주사(告奏使)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고, 1093년에는 공부시랑으로 사은부사(謝恩府使)가 되어 송나라에 가서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얻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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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청주향교에 있는 홍재희(洪在羲)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 조선 고종 대에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지낸 홍재희의 유학진흥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이다. 비의 뒷면에 건립경위가 새겨져 있는데, 건립 시기는 “光緖十四年戊子二月日(광서14년 무자 이월일)” 즉 1888년(고종 25) 2월이고, 세운 이는 “本校西齋生立(본교서재생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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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문신. 청주목사로 재직할 때에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특히 재물의 씀씀이를 절약하였는데, 백미 20섬, 현미 70섬, 좁쌀 80섬, 메밀 30섬, 베 1천 필을 얻어 그것을 밑천으로 이식을 취하여 이 고을의 의재(義財)를 마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색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 명환조」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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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정주(貞州)이며, 자는 거실(居實)로 정주이씨의 시조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다방(茶房), 내시 등의 벼슬에 이어, 1217년(고종 4)에는 정융분도원사 조충(趙冲)의 막하로 있다가 그의 천거로 대영서승(大盈暑丞)이 되고, 백령도의 진장이 되어 처음으로 향교를 창설하여 제자를 교육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신호위 녹사에 올라 도병마사를 겸하고, 뒤에 우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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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익산(益山)이며, 상서좌복야 한림학사 승지 이주(李湊)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사록이 되고, 상서도사로 직사관을 겸하였으며, 뒤에 지홍주사(知洪州使)가 되었다. 원종(元宗) 때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포로가 되어 반란군의 선법(選法)을 맡았다가 김방경(金方慶)에게 붙잡혔으나 김방경의 아버지 이인의 제자였다 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 청주목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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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외평동에 있는 임항조(林恒祚)와 채세환(蔡世煥)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 1926년의 홍수 복구사업에 공헌한 임항조와 채세환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930년에 세운 공적비이다. 상당구 외평동 마을 입구의 청주에서 청주공항으로 가는 국도 변 오른쪽에 있다. 사각형의 화강암 받침돌 위에, 높이 123㎝, 폭 47㎝, 두께 18㎝의 비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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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에 있는 구완식의 비석. 조선 고종대에 충청절도사(忠淸節度使)를 지낸 구완식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3년에 세운 비석이다. 상당구 우암동 우암산 순회도로 청주대학교 부근의 속칭 비선거리에 있는 8기의 비석 중 왼쪽부터 세 번째에 있다. 사각의 화강암 받침돌 위에, 높이 132㎝, 폭 45㎝, 두께 2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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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光宗)[946~975]이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年號). 고려 4대 왕인 광종은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많은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예를 들면 노비안검법을 마련하여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양민이 되게 하였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특히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라 고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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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에 있는 허직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 조선 고종(高宗) 대에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지낸 허직(許稷)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865년(고종 2)에 건립하였다. 상당구 율량동 율봉공원의 율량동 고가 입구에 있는 4기의 비석 가운데 세번째 비석이다. 비석의 반 이상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온전한 비석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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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에 있는 학생독립기념탑.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주도된 3·1운동과 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청주농업고등학교 동문회에서 건립하였다. 본래의 기념탑은 1982년 ‘나라 사랑 탑’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1998년 8월 그 규모도 늘리고 명칭도 ‘청농학생독립운동기념탑(淸農學生獨立運動紀念塔)’으로 바꾸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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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에 있는 용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 용지(龍池)를 기념하여 1983년 10월 마을 사람들의 이름으로 세웠으며, 비문은 한달우가 짓고 글씨는 한갑수가 썼다. 상당구 방서동 큰대머리마을 앞인 용개뜰의 농수원(農水源)으로 쓰이던 ‘용지’ 연못의 내력에 대해 기록하였다. 상당구 방서동 큰대머리마을 앞으로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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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에 있는, 효자 양수척(楊水尺)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수척은 조선 세조~성종 년간에 두 아우와 함께 청주에 살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무뢰와 횡포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늙은 어머니에게도 공손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노모는 항상 이들 형제들을 걱정하다 병이 들어 눕게 되고, 누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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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의 비석.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戰蹟碑)로 그가 죽은지 약 120년 뒤인 1710년(숙종 36)에 세워졌다. 상당구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옮겨, 현재는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서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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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비석. 조선 고종(高宗) 때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1866년(고종 3)에 있었던 병인양요와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를 통해 서양세력을 격퇴한 후 그 전승을 기념하고 척화를 강조하기 위해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청주 척화비도 이때 세운 것이다. 상당구 남문로 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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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에 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 한란의 내력을 서술한 비석. 조선 선조 때 청주목사겸 청주진병마절제사로 부임한 한백겸(韓百謙)이 자신의 시조인 한란(韓蘭)[?~?]을 제사지내기 위해 1605년(선조 38)에 건립하였다. 한백겸은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고, 그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韓浚謙)은 제사 때마다 후손들이 읽고 알 수 있도록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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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지북동에 있는 청주경씨의 사적비. 상당구 지북동에 세거해온 청주경씨의 문중에서 선대(先代)의 내력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비석이다. 23세손인 문인(門人) 경철호(慶哲浩)의 발의로 청주경씨 내력 및 주요 인물들에 대한 사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의 모범을 삼고자 한 것이라 하여, 비석을 건립한 목적을 기술하였다. 이곳 일대는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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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동에 있는 학생의거 기념탑. 1929년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한 청주고등보통학교(현재 청주중학교) 학생 7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1년 11월 3일에 세웠다. 상당구 영동 청주중학교 교정에 있다. 본래의 기념탑은 1971년 11월 3일에 세운 것이나, 현재는 1997년 11월 3일 다시 세운 것이 남아 있다. 지금의 기념탑은 3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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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자는 정보(正甫)이고, 구명은 거린(巨鱗)이다. 중서주서(中書注書)로서 청주통판(淸州通判)이 되었을 때 정사를 돌봄에 있어서 이속(吏屬)들에게는 엄하고 백성들에게는 긍휼(矜恤)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사간에 이르렀고, 기거사인으로 서해도 안찰사가 되었다. 상주사록으로 있을 때에 청빈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122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이 실각하자 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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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주치(州治)의 서문(西門) 밖에 있던 군인을 사열하던 장소. 현재까지 치부당(治賦堂)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즉 치부당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 건물이었는지 등, 현재 청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유적 혹은 유물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발간된 『청주읍지(淸州邑誌)』에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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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표충사(表忠祠)의 이건 내력을 기록한 비석. 1731년(영조 7)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북문 안에 표충사(表忠祠)를 1939년 도시계획에 밀려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와 관련된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상당구 수동 표충사(表忠祠) 안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 바깥 정원에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0㎝,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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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 때 청주지방의 호족세력이 세운 학원(學院)을 관장하던 차관 격의 관직.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약 100년간 전국의 지방에는 ‘호족(豪族)’이라고 불리는 토착세력들이 반독자적인 사회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청주지방 역시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앙정부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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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초 청주지방의 호족세력이 세운 학원(學院)을 관장하던 관리. 학원낭중(學院郞中)은 청주 호족들이 건립한 ‘학원’이라는 관부를 관장하던 관리의 하나로서 낭중(郞中)은 본래 신라의 중앙관직으로서 집사성(執事省)이나 병부(兵部), 창부(倉部) 등에 속한 관직으로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痲)가 이에 임명되었으며, 고려 때에는 상서성, 육조에 속한 정 5품의 벼슬이었다. 신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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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원평동에 있는 홍재봉(洪在鳳)의 비석. 강서면장(江西面長)을 지낸 홍재봉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홍재봉은 까치내보[鵲川洑] 공사 및 식량증산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1956년 7월 몽리자일동(蒙利者一同)’의 이름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비석의 상태로 보아 최근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 흥덕구 원평동에서 청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