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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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용성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 시대의 무덤
[개설]
청도 지역은 크게 동쪽의 동창천 유역권과 서쪽의 청도천 유역권으로 구분된다. 동창천은 동쪽의 경상북도 경주시와의 경계에서 서남으로 흘러 청도군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청도천은 서북쪽 대구광역시와의 경계인 각북면에서 발원하여 서쪽 경상남도 창녕군과의 경계인 풍각면에서 서로 흐르는 소하천과 합류하여 동으로 흐르다 화양읍을 지나면서 남류하여 청도읍을 통과해 남쪽으로 흐른다. 이 두 하천은 청도군의 권역을 지나 바로 합류하여 밀양강을 이룬다. 따라서 청도 지역의 고분 떼는 밀양강 상류의 고분 떼라 할 수 있다.
한편 청도의 양대 젖줄이 되고 있는 이 두 개의 하천은 경주에서 창녕으로 가는 루트를 형성하여 일찍부터 경주에서 낙동강 유역권으로 가는 노선으로 개발되었다. 따라서 여기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 떼는 경주에서 창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형성되어 있는 신라 고분 떼로 볼 수 있다.
[청도군 고분 떼 현황]
청도 지역에서 지표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 고분 떼는 동창천 유역권의 경우 상류부터 운문면의 방음리·오진리·정상리·마일리, 금천면의 박곡리, 매전면의 구촌리·관하리에, 청도천 유역군이 상류부터 각북면의 우산리·삼평리·남산리·덕촌리·금천리, 풍각면의 성곡리·금곡리·안산리·덕양리, 이서면의 칠엽리·구라리·서원리·각계리·학산리·수야리·흥선리·고철리·양원리·신촌리, 화양읍의 교촌리·동천리·범곡리·고평리·토평리·구곡리·옥산리, 청도읍의 송읍리·원정리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한 곳에 분포하나 2개로 나뉘어 군집하는 고분 떼가 있어 청도 지역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 신라의 고분 떼는 모두 43개소가 확인된 셈이다.
이들 고분 떼 가운데 발굴된 것은 분포하고 있는 숫자에 비해 아주 적다. 그것은 청도 지역에 현저한 고총고분 떼가 분포하고 있지 않아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발굴된 고분들은 대부분 구제 발굴로 조사되었다. 발굴된 고분 떼는 운문댐의 건설로 인해 조사된 동창천 유역권의 순지리 고분 떼와 근래 건설 공사로 인해 발굴된 청도천 유역권의 원정리 고분 떼, 봉기리 고분 떼, 성곡리 고분 떼 등이 있다.
발굴된 고분 떼에서 확인되는 고분은 대부분 신라 고분이고, 좀 더 이른 시기의 것은 아직 조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인 경상북도 경산시과 경상남도 밀양시 등지에서는 더 이른 시기인 원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의 조사 예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그러한 시기의 고분 조사가 기대된다. 조사된 고분 떼는 신라 양식의 토기가 출현하기 직전인 4세기 중엽 무렵의 토기가 부장된 덧널무덤부터 인화문이 시문된 통일 신라 토기가 출토되는 7세기 후반의 돌방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청도군 고분의 변천]
청도 지역의 고분은 대부분 봉분이 파괴되거나, 도굴로 파괴되어 잔존하고 있는 유구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것이어서 그 총체적인 변천상을 살피기가 어렵다. 다만 발굴된 고분들은 그 변천 과정이 신라권 다른 지역의 고분 변천상과 그리 다른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제한적이지만 이들 발굴 고분의 구조와 출토 유물을 통해 그 변천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은 봉기리에서 조사된 덧널무덤이다. 이들 덧널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안에 장방형의 덧널을 설치한 다음,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에 충전토를 채우고 그 위에 봉분을 조성한 것이다. 내부에서는 아직 신라 양식의 토기가 출현하기 이전 공통 양식기의 고식 도질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굽다리 접시·손잡이 잔·바리 모양 그릇 받침·항아리 등의 토기와 쇠낫·도끼 등의 철기류, 녹각제의 칼자루 장식 등이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 토기의 굽다리 접시는 긴 다리에 투공을 한 것과 아래 위가 일렬을 이루도록 가는 장방형의 투창을 뚫은 것으로 대략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 토기는 낙동강 이서의 함안 등지와 창녕 지역의 남부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그 문화가 낙동강 하류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축조되는데, 성곡리·봉기리·순지리·원정리에서 모두 조사되었다. 돌덧널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냇돌이나 깬돌을 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돌덧널 위에는 뚜껑돌을 덮은 것도 발견되어 대부분 큰 돌로 뚜껑을 덮은 후 봉토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돌덧널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신라 양식 초기의 것을 비롯하여 전형적인 고신라 토기가 출토되기도 하고, 늦은 시기의 것에서는 신라 후기 양식이라 부르는 짧은 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와 부가 구연 목 긴 항아리가 출토되어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이 묘제로 고분이 축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시기에는 독무덤이 함께 축조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 독무덤은 먼저 돌덧널을 축조하고 그 안에 그릇을 이용하여 주검을 매장한 돌덧널독무덤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 축조되는 묘제는 돌방무덤으로, 조사된 돌방무덤은 운문댐으로 인해 발굴된 순지리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 돌방무덤은 파손이 심해 원형을 확인할 수 없지만 비교적 넓은 장방형의 돌방을 조성하고, 한 쪽 벽을 터 주검을 매장하는 앞트기식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돌방의 내부에는 연이어 축조한 주검받침이 발견되어 추가장이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널길을 갖춘 굴식의 돌방무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돌방에는 전형적인 고신라 토기도 출토하나 많은 것이 짧은 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와 부가 구연 목 긴 항아리를 세트로 하는 신라 후기 양식의 토기이다. 그리고 이미 인화문이 출현하여 토기에 시문된 것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들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대략 6세기 초부터 7세기 말 정도까지에 걸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제의 변천상은 덧널무덤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다시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 묘제가 변천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다른 신라권 지역의 묘제 변천상과 부합하고 있다.
[청도 고분의 성격]
청도 지역은 신라에 통합되기 전 이서국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조사가 미진하여 분명한 이서국의 고분은 확인되지 않고 신라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이나 그 직후의 고분과 이후의 신라 고분만 확인되고 있다. 이른 시기의 고분이 덧널무덤을 채용하고 있고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낙동강 하류역의 묘제나 출토 유물과 커다란 차이가 없는데, 이는 청도 지역이 4세기 중엽 무렵까지 낙동강 하류역과 많은 관련이 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는 신라식의 토기가 출토되는 돌덧널무덤이 발견되어, 이때 이미 신라에 복속되고 경주와의 관련성이 확대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사된 43개소의 고분 분포를 보면 현재의 이서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훨씬 더 많은 고분이 분포하는 현상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이곳이 이서국과 그 나라가 신라에 병합된 후의 중심지였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아직 다른 신라권 지역과 같이 대형의 봉토를 가진 고총고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삼국 시대 이서 지역의 세력 집단 분포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많은 고분 떼 가운데 일부만 발굴되어 당시의 세력 동향을 읽어 낼 수 없는 형편이다. 남아 있는 고분도 대부분 도굴되거나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앞으로 이들 고분에 대한 적절한 보존 대책이 수립되고 학술적인 발굴 조사를 통하여 청도 지역의 문화 현상이 밝혀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