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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경인 가는 철도가 여기 있잖아요. 경인 가는 철로에서 사람이 많이 다치고 죽었어요.” 송내동 주변으로 경인철도가 생기고 기업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특히 송내동은 경인철도가 인접하고 있어 사고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주민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담벼락 등의 장치들이 마련되지 않아서 항상 위험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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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유서 깊은 교육지대 송내동은 부천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적으로 부천의 명문학교인 부천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십 여 개의 학교가 송내동에 몰려있으며 유서 깊은 학교 상당수가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왜 학교가 송내동에 많이 생겼냐 하면 땅 주인들이 학교를 유치할 수 있는 부지를 선뜻 내놓았기 때문이에요. 지금 부천여고는 당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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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농가에서 공업단지로의 변신 도시화 과정에서 송내동을 가로지르는 하천의 유역과 습지는 메워져서 농지나 택지로 변했고 오염도 많이 심화되었다. 다양하게 서식하던 야생동물들도 자취를 감쳤다. 그러나 송내동은 개발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 아늑하고 조용한 부락이었다. “송내동 자랑이요? 그냥 평화로운 동네라고 할까요. 도시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주변 냇가에서 물고기 잡으러 다니고 그러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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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나가면 ‘짠짠바라’ 사무라이 칼싸움하는 영화를 해줬어. 그럼 극장 뒤로 숨어서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했지.” 요즘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놀거리가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놀거리 없이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작고 아담한 동네에서 동네방네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로 만나서 몰려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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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 공장은 고맙게도 노인정을 짓는 데 후원해 주기도 했다고. 그 기금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지” 송내동이 급격한 도시변화를 이룬 1960~70년대. 오랫동안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던 마을의 생활모습도 예전에 비해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속에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하는 등의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예컨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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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집안이 좀 살 만한 사람들은 집안에 우물이 있었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공동우물을 많이 먹었지.” 옛날에는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그 흔한 물도 상당히 먹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충분하게 물을 먹고 쓰기 위해서는 우물이 필요했지만 우물을 파고 유지하는데 상당한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모두 우물을 보유하기가 어려웠다. 일부 돈 많은 부자 집에서만 우울을 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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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잔치나 행사는 척사대회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우물에서 제를 지내는 것은 소규모고, 척사대회는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서 했으니까요.” 옛날 여느 시골마을이 그랬듯 송내동에는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 때가 되면 마을사람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크고 작은 잔치가 많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모두다 같이 모여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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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통조림 열풍이 불어 닥친 송내동 복숭아를 수확하는 작업은 매우 고된 일이다. 정직하고 꾸준한 관리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함께 모내기를 하고 벼를 베듯이 복숭아수확 또한 여러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 시기를 맞춰 과일을 수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장마라도 조금 길어지면 수확 적기를 놓쳐 일 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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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농장 옆에 도축장이 있었어요. 소 한 두 마리 정도 잡을 만한 공간 정도였죠.” 지금은 도심 어느 곳이나 먹거리가 풍부하고 동네마다 고기 집 간판이 즐비하지만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고기가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거친 어른들은 가끔 동네의 관혼상제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 애써 키워왔던 돼지나 소를 직접 잡아서 이웃에 돌리며 함께 나누어 먹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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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연학습장, 성주복숭아축제 고품질의 과일은 일교차와 일조량이 만든다. 특히 일교차가 커야 맛, 당도, 향기 등이 뛰어나고 육질이 단단한 열매가 된다. 그런 면에서 송내동은 복숭아 재배지로서 최적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진행된 부천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로 대규모 복숭아 과수원 단지는 주택단지 등으로 변모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소사복숭아의 자취를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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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의 집성촌 부천은 그리 규모가 큰 도시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다. 비록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그 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민씨, 변씨, 신씨, 박씨 등이 오랫동안 부천에 세거하였다. 집성촌은 동일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씨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정착, 형성 후 오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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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복사꽃이 피어나는 무릉도원 부천은 현재 심곡본동인 깊은구지와 송내동 지역을 중심으로 소사 복숭아밭이 중점적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이곳에서 수확량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도 부천의 소사복숭아를 맛보기 위해 실제 산지인 송내동을 중심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부천 전역이 모두 다 복숭아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물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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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국은행 화폐소각장이 지금의 송내 2동 사무소 앞에 있는 송내실내체육관 자리에 있었죠.” 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국내의 은행권은 100% 면으로 만들어져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은행권 생산은 수준 높은 기술이 요구되고 있는 첨단산업으로, 한국조폐공사는 선진적인 제조 기술을 인정받아 해외로 화폐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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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국도변 복숭아 좌판이 언제부터인가 하면 정확히는 몰라도 70년대 초부터 활성화가 됐던 걸로 기억해요.” 가난했던 1970년대. 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풋과일은 여느 만찬에 못지않은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특히 머리에 광주리를 인 아주머니가 산지 복숭아를 한 가득 담고 팔러 다니면 10원을 내고 열 개씩 사와서 우두둑 소리가 나게 씹었다. 이 시절을 살았던 부천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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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잔치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가서 사흘, 나흘 동안 잔치가 끝나도록 도와주지...” 송내동은 옛날에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고 서로 돕고 사는 화목한 마을이었다. 마을에 일이 생기면 같이 나누고 함께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마을에 잔치가 생기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당시 잔치라고 하면 그냥 동네일을 나의 일처럼 보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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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올라가서 쥐불놀이도 하고 복숭아서리 하고 그런 것들은 저희 때는 흔해서 재미가 없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복숭아의 매력은 서리를 해 먹는 재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땅히 군것질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밭모서리 복숭아 나뭇가지에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를 보고 군침만 삼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채 익기도 전 풋내가 날 때부터 시작된 복숭아 서리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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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정서를 뒤흔드는 마을 서울하고 가까운 역곡역 언저리나 인천하고 가까운 송내역 언저리는 고속도로 너머의 북쪽 동네들과 마찬가지로 부천시의 중심지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으며 아직까지 시골냄새가 꽤 짙은 곳이다. 송내동 남쪽은 국도를 따라 부천시의 중심지에 닿아 있으나 북쪽 지역으로 갈수록 농촌의 모습을 띤다. 그런가하면 고속도로 너머의 동네들은 부천시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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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났을 때 내가 21살이었는데 26일 쯤 천둥치듯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 줄은 몰랐는데...” 한국전쟁 발발. 송내동에도 예외는 없이 전쟁을 알리는 큰 굉음이 일었고 이후 송내동에도 많은 군인들이 오고 가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생애 가장 충격적이었던 전쟁의 기억은 송내동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당시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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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이 모자라서 동사무소에서 연탄카드를 발급해줬어요.” 연탄은 무연탄을 주원료로 하여 여기에 다른 탄화물을 분쇄·배합하거나 점결제(粘結劑)를 혼합해서 성형·건조시킨 원통형 고체연료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네 삶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생필품이다. 특히 연탄은 지금도 옛 추억을 떠올리는데 있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재 중에 하나일 정도로 우리 삶의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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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국악 단체. 영남판소리보존회 부천지부는 유네스코의 세계 무형문화재에 선정된 판소리를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함으로써 판소리의 저변을 확대하며 보존 계승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다양한 영남판소리 공연을 개최하면서 국악의 보급화 및 판소리 저변 확대와 보존 계승에 힘쓰고 있다. 2008년 현재 영남판소리보존회 부천지부는 정정미 회장을 비롯하여 35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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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 방범도 많이 돌았잖아요. 딱딱이 들고요. 옛날에는 그런 게 다 있었어요.” “마을에서 몇 사람씩 조를 짜서 나무로 딱딱딱 소리를 내면서 다녔어요. 그게 한 마디로 도둑을 방지하는 방법이었죠.”(박순규, 부천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송내동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어려울 때 하나 되는 주민들의 단합이었다. 특히 마을에 좀도둑이 자주 들자 젊은 주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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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떨어지면 천자문 배우는 애들도 있고, 일을 하는 애들도 있는데, 대부분은 남아서 집안일들을 많이 도왔지.” 지금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이 정착되어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들이 향상되면서 얼마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비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립교육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높아졌지만, 적어도 일정 수준까지는 의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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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정 때 남자들은 결혼을 해서 호주로 되어 있으면 징병을 가지 않기 때문에 결혼들을 일찍 했고.” 송내동에는 이제 지역 원로 분들이 거의 계시지 않는다. 그 중에서 조순천, 박병설 할아버지는 송내동에서 거의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송내동에 일어났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간직하고 계셨다. 특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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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려서 자라면서 피라니 산소라고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큰 능이 하나 있었어요.” 송내동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능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어려 자라면서 피라니 산소라고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큰 능이 하나 있었어요. 저 위에 피라미인지, 피라니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피라니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그게 없어졌는데 우리 어렸을 적에 굉장히 그게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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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구루마에 복숭아를 가지고 나오시는 분들은 묵인을 해줬어요.” 1946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 1호에 따라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을 대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88올림픽 유치 직후였다. 밤 12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면서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쳤다. 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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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포수가 계셔가지고 계양산에서 노루가 뛰었다고 산으로 잡으러 가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작동마을에 가고 싶어진다. 바람이 불면 작동의 보리밭 초록물결이 더욱 일렁인다. 사실 보리밭에 대한 느낌과 의미는 세대별로 다르다. 현재를 사는 아이들에게 보리밭은 그저 신기한 풍경쯤으로 여겨질 법도 하나, 적어도 30년 전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들에게 넘실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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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때 학교 선생님들이 공업고등학교를 가면은 대학을 안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능인들이 된다고 하셨죠.” 부천공업고등학교는 부천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중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부천농업중학교로 처음 개교를 하였다. 그러다 1954년 소사농업고등학교로 설립인가가 나고 1973년에 부천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