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D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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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웅규 |
죽산박씨의 집성촌
부천은 그리 규모가 큰 도시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다. 비록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그 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민씨, 변씨, 신씨, 박씨 등이 오랫동안 부천에 세거하였다.
집성촌은 동일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씨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정착, 형성 후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마을이다. 그래서 혈연에 대한 유대가 깊고 아울러 그 선조나 집안의 유풍을 고스란히 간직한 경우가 많다. 또 국난이나 공동체의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죽산박씨도 오래전부터 이곳 부천 지역에 자리를 잡으며 지내왔는데 그 중에서도 송내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임진왜란 전에 부천에 정착한 죽산박씨 박철정의 6세손인 박세환이 사래리[현재 역곡 2동]에서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본격적인 박씨 가계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죽산박씨 집성촌에 있는 몇 채의 가옥들이 근래에 와서 새롭게 신축 또는 개조되어 마을의 전통적인 분위기가 일부 훼손되었다. 그러나 죽산박씨 집성촌은 그나마 부천 지역에서는 전통마을의 모습을 잘 유지하는 편에 속하는 송내동의 대표적 마을이다.
“내가 죽산박씨인데 사실 송내동이 박씨 집성촌이었어요. 이곳 터줏대감을 자처하고 제일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 박씨이기도 하고요. 역사에도 나오지만 한 500년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았죠.”(박순규, 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본래 죽산박씨의 시조는 충정공 박기오이다. 박기오는 신라 경명왕의 넷째 아들 박언립의 아들로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 태보삼중대광에 이르렀고, 충정이라 시호되었으며, 죽주백(竹州伯)에 이봉됨으로써 죽산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의 12세손인 박철정은 연산군 때 추국을 당한 뒤에 부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에 부천에 거주하는 죽산박씨의 입향조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 후손들은 송내동과 역곡동을 중심으로 정착하며 살아오게 되었다.
부천에서 제법 큰 규모를 이루며 살아오고 있는 여흥민씨가 경숙옹주의 묘를 지키기 위해 이주해 온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이다. 죽산박씨가 송내동 지역에 들어온 이후 평산신씨도 들어왔다.
“박씨가 부천에서 저 역곡 사래리라는 데서 일부가 이리로 온 거예요. 여기로 와서 뿌리를 내린 거죠. 역곡의 박씨들은 다 (같은) 집안들이예요. 박씨 다음에 신씨가 들어왔는데 신씨도 여기서 꽤 오래됐어요. 신씨도 한 300년은 넘었을 거예요.”(박순규, 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죽산박씨와 함께 송내동의 대표적인 성씨인 평산신씨는 배현경, 홍유, 복지겸과 더불어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립하는 데 앞장 선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인 신숭겸의 27세손인 신휘 때 경기도 양주에서 이주해 와서 부천 송내 1동의 산골에 정착하여, 10대가 이어져오면서 약 300년을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500년, 3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 곳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있는 집성촌 사람들. 그들은 부천의 오늘을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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