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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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住寺址 佛臺座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정성권 |
현 소장처 | 보령 성주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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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보령 성주사지의 금당지 중앙에 있는 불상 대좌.
[개설]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시대 오합사(烏合寺)라는 절로 창건된 후 삼국 통일 직후 김인문(金仁問)의 원찰(願刹)로 크게 중창되었다. 9세기 전반경 김헌창(金憲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통일 신라 후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으로 새롭게 개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지 불대좌(聖住寺址 佛臺座)는 보령 성주사지의 금당지(金堂址) 중앙부에 있으며, 대좌의 하대석 이하 부분만 남아 있다.
[형태]
성주사지 불대좌는 평면 방형의 불상 대좌로서 본래는 상대석과 중대석, 하대석으로 구성된 대좌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하대석과 하대석 받침인 하대하석, 지대석만 남아 있다. 하대석은 각 면에 3엽의 복판(複瓣) 연화문(蓮華文)과 모서리 부분에 각 1엽의 연화문이 있으며, 도합 16엽의 복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 아래의 하대하석은 측면에 안상문(眼象文)이 새겨져 있다. 하대하석 아래의 지대석은 수 매의 대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였다.
[특징]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는 일반적으로 평면 팔각형의 불상 대좌가 유행하였다. 방형 대좌는 9~1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9세기 방형 대좌로는 동화사(桐華寺) 비로암(毘盧庵) 삼층석탑 출토 금동(金銅) 사리함(舍利函)의 사방불(四方佛)에서 확인된다. 금동 사리함은 함께 출토된 명문 기록에 의해 863년(경문왕 3)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시기의 대표적인 방형 대좌로는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陜川 淸凉寺 石造如來坐像), 합천 안정사지(安靜寺址) 석조대좌(石造臺座)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평면 방형 대좌로는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와 더불어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방형 석조대좌, 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醴泉 靑龍寺 石造毘盧遮那佛坐像),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靑陽 長谷寺 鐵造藥師如來坐像 - 石造臺座) 등을 들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 방형 석조대좌는 현재 지대석과 하대하석만 남아 있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대하석의 면석에 다섯 개의 안상(眼象) 문양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 모습은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의 하대하석과 유사하다.
[의의와 평가]
보령 성주사지 발굴 조사 결과 대좌 하부에 기반 시설로 부석(敷石)[깐돌]과 다짐층이 번갈아가며 다져져 있는 토층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본다면 성주사지 불대좌는 9세기 중반경 무염(無染)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개창하였을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1년경 보령 성주사지를 조사하였던 이은창(李殷昌)은 성주사지 인근 마을에 거주하였던 노인으로부터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1910년 무렵 일본인이 철불상(鐵佛像)을 반출하였다는 증언을 들었다.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철불상은 “성인이 불상 무릎 위에 서서 겨우 귀를 손으로 만질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는 비로자나대불(毘盧遮那大佛)이 하나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성주사지 불대좌에는 무염이 성주사를 개창할 무렵 주조되었던 비로자나철불(毘盧遮那鐵佛)이 봉안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