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81
한자 丙寅迫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영보리 375-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6년연표보기 - 병인박해 발생
발생|시작 장소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영보리 375-2]지도보기
성격 천주교 박해 사건
관련 인물/단체 흥선대원군|김면호|홍봉주|남종삼|베르뇌|다블뤼|정의배|전장운|최형|리델

[정의]

1866년 천주교 선교사와 교인이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순교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 .

[개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866년 봄, 두 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 세 번째는 1868년, 네 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천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866년의 세 번째를 무진사옥(戊辰邪獄), 1871년 네 번째를 신미사옥(辛未邪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계속 추진된 것이기 때문에 병인박해에 포함하여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인 1866년 한 해 동안의 박해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이후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흥선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하게 된 배경에는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 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숨어 있었다.

1858년 6월 애로호 사건에 따라 톈진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러시아가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김면호(金勉浩)[1820~1866]·홍봉주(洪鳳周)[1814~1866]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름]의 방아책(防俄策)[러시아를 막는 방법]을 건의하여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1817~1866]은 흥선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보다 구체화하기 위하여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Berneux, Siméon François)[1814~1866]와의 만남을 권유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지방에 머무르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Marie Nicolas Antoine)[1818~1866]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그사이 흥선대원군의 처지는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의 처지가 바뀐 이유는 1866년 1월에 도착한 북경 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 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 살육에 대한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 소식은 반흥선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정치적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洋夷)[나라의 문을 닫고 외국 오랑캐를 물리침]와 사교금압(邪敎禁壓)[그릇된 가르침을 막아 누름]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에도 천주교가 침투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경과]

1866년 2월 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정의배(丁義培)[1794~1866]·전장운(全長雲)[?~1866]·최형(崔炯)[1814~1866]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 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Félix Clair)[1830~1884]은 7월 조선을 탈출하였고,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 Pierre Gustave)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였고, 결국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제2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양이(洋夷)[서양 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처형 장소는 주로 서울과 해안 지방으로 정해졌다. 또한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 Ernst Jacob)[1832~?]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을 알게 된 흥선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 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인근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보령 지역 역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가 생기게 되었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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