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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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海寬 |
영어공식명칭 | Park Hae-gwan |
이칭/별칭 | 경흠(景欽),회당(悔堂),봉계(鳳溪)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출생 시기/일시 | 1824년(순조 24) - 박해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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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1년(고종 28) - 박해관 진사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901년(고종 38) - 박해관 사망 |
출생지 | 박해관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종리 원종 |
유배|이배지 | 박해관 유배지 -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 |
묘소|단소 | 박해관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율항]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자 |
본관 | 순천(順天) |
대표 관직 | 진사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출신의 학자.
[가계]
박해관(朴海寬)[1824~1901]의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경흠(景欽)이며, 호는 회당(悔堂) 또는 봉계(鳳溪)이다. 박숙정(朴淑貞)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박태윤(朴太胤),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시정에 증직된 박홍문(朴弘文), 할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증직된 박귀엽(朴龜曄),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박능현(朴能鉉)이다. 외할아버지는 진주정씨 정계대(鄭啓大)이다. 장인은 칠원윤씨 윤재상(尹載相)이다. 아들은 박후동(朴厚東), 박흔동(朴昕東), 박우동(朴祐東)이다.
[활동 사항]
박해관은 7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해서 12살에 경사(經史)에 정통했다. 집안이 곤궁했지만 학문에 힘쓰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과감했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자 4년 동안 똥을 맛보아 증상을 살폈으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시도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주자가례』에 의거해 준행했다. 1862년(철종 13)에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철종이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뜻으로 수령과 여러 선비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때 박해관은 책문을 올려 권귀(權貴)와 수령들의 탐학과 농세(弄勢)를 꾸짖었는데 그 말이 매우 통절(痛切)했다. 이로 인해서 전라남도 고금도(古今島)로 귀양 가게 되었고 후에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어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에 각지의 여러 선비가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둔암(屯菴) 김필태(金必泰)[1728~1792]가 만들었던 옥계정(玉溪亭)이 무너지자 박해관이 중심이 되어 계를 조직해서 중건하고, 이곳에서 강회를 열었다. 서양인들의 침범이 있자 1876년(고종 13)에는 척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문을 발송했고, 1895년(고종 32) 봄에는 포고문을 내어 무장해서 싸우자고 통문을 발송했다. 1891년(고종 28)에 실시된 신묘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했다. 1893년(고종 30)에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돈녕부사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부모의 묘 아래에 정자를 짓고 ‘염수(念修)’라 이름하고 학도들과 강학했다.
[학문과 저술]
박해관의 문집으로 『회당집(悔堂集)』과 『회당잡지(晦堂雜識)』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시(詩), 서(書), 장(狀), 효유문(曉諭文), 설(說), 서(序), 기(記), 제문(祭文), 포고문(布告文), 원정(原情), 록(錄), 명(銘), 단자(單子) 등이다. 『회당실록(晦堂實錄)』도 있다.
[묘소]
박해관의 묘소는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율항(栗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