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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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濡 |
이칭/별칭 | 군택(君澤),죽당(竹堂),이옹(泥翁),이선(泥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형성 |
[정의]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문관.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이옹(泥翁)·이선(泥仙). 7대조는 대사간 신말주(申末舟)[1429~1503]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신언식(申彦湜), 할아버지는 신심(申淰), 아버지는 공조 정랑(工曹正郞) 신기한(申起漢)이다. 외할아버지는 김영국(金英國)이고, 장인은 이효승(李孝承)이다. 아우는 초암(初庵) 신혼(申混)[1624~1656]이다.
[활동 사항]
신유(申濡)[1610~1665]는 1610년(광해 2) 출생하여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6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이조 정랑이 되었다. 1639년 문학(文學)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있다가 2년 만에 돌아와서 참판을 지냈다. 1643년(인조 21)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에 대한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사절단으로 가면서 부산(釜山)을 “산 모양이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와 붙어 있네.”라는 글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 후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내고, 1652년(효종 3) 사은 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7년(효종 8) 대사간으로서 국왕을 능멸했다고 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천안으로 옮겨졌다. 그 후 풀려나 1661년(현종 2) 형조 참판이 된 이후 호조 참판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예조 참판이 되었고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글씨에 뛰어나고, 아우인 신혼과 함께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인으로는 석희박(石希璞)이 있다. 저술로 『죽당집(竹堂集)』, 『신죽당 해사록(申竹堂海槎錄)』이 있다.